전혀 어떤 영화인지 몰랐고 정보도 없었다. 또 장애를 주제로 한 영화라고 해서 머리에 미리 그려지는 공식 같은 것들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그다지 크게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강의시간에 보게 된 영화는 이런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었다. 사실 처음에는 영화 내용을 이해하기에 그다지 쉽지 않은 복잡하고 지루한 도입부 때문에 접근이나 흥미 유발이 어려웠었다. 게다가 영화 기법이겠지만 주인공의 환상과 환청 현상이 실제와 섞여져서 오히려 보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 내용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솔직히 이 영화가 논픽션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 진 줄 전혀 몰랐었다. 이건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다. 픽션들이 예술가나 문학가들의 손과 상상력을 거치면 독자나 시청자는 그 모호하고 해독이 불가능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나 모든 예술세계의 픽션은 인간의 경험이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즉 이 말은 모든 예술작품이나 문화는 인간의 현실과 경험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 주제에 대해 깊은 공감을 넘어서는 완전한 동의를 할 수 있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소우주라고 하는데 그 인간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실상은 얼마나 복잡한지! 게다가 인간의 타락이 가져다 준 죄는 그 내면세계의 파괴와 혼란, 상처를 가져왔기에 그 현실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고 거의 불가사의 수준이다.
그러나 영화의 해피엔딩 결론과는 달리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전적 동의를 할 수 없는 한 가지 현실에 기초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영화처럼 인간이 그렇게 쉽게 회복되고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와 근거가 있다.
상담학, 심리학, 정신과 치료 등은 물론 그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되겠지만, 이것만으로 나는 한 사람의 병들고 상하며 찢겨진 복잡한 내면세계가 완전하게 치유되며 회복되는 것을 지금까지 본 적이 별로 없다. 즉 한계가 있었고 아니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다는 것은 인간 내면세계의 건강함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사후 치료보다 사전 예방이라는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가공과 영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진 이 영화를 통해 큰 감동과 깨달음과 도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 주인공의 자신과 싸우는 의지, 또 그보다도 훨씬 감동적이었고 아픔까지 느낄 정도로 희생적이며 헌신적이었던 주인공의 아내였다. 내면의 치유의 핵심은 자신의 질병을 의식화하며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뤄지면 분명 나는 회복과 치유의 50% 이상이 확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 또한 현장의 실제에서 얻어진 경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치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어쩌면 이 과정이 가장 아프고 통증이 있으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노출과 인정, 자기 질병에 대한 용납은 그 자체로 싸움이며 두려움이다. 심리 상담에서 말하는 소위 객관화 과정이다. 어쨌든 주인공은 이 과정을 통과했고 그 아내는 주인공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줄 수 없는 극한의 인내와 희생, 헌신, 이해와 용납으로 남편을 치료하는 빛을 제공한다.
시골로 이사해서 살던 그의 재발을 보고 아내가 박사와 상담하여 재입원과 치료를 하기로 했을 때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두려움과 갈등을 보며 어떤 희생과 어려움이 있어도 병원에 보내지 않고 다른 방법과 길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자는 대목에서 왜 그렇게 마음이 먹먹하고 짠한지!
현장에서 경험한 사실에 기초하면 한 사람의 내면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결정적 원인은 그 한 사람을 충분히 지지하고 사랑하며 이해, 용납, 인내를 베풀면서 다양하게 세워줄 수 있는 한 사람과 하나의 소그룹이다. 문제는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니까 주인공의 아내가 그렇게 감당했겠지만 현실이라는 완전히 말이 달라진다. 이건 거의 십자가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희생을 요구한다. 한 사람이 죽어야 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진리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용납과 인내 앞에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열리지 않는 마음도 없다는 것 또한 목회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누군가 자신을 제단에 사랑의 희생 제물로 올려놓기 전에는 치유와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비록 픽션이고 실제 내용은 영화와 달랐다 하지만 큰 도전과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영화에서 존 내쉬와 알리샤의 사랑에 초점을 둔 대화가 가슴에 와 닿는다.
“우주는 본적도 없고 그 크기가 무한대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확신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도 합리적으로 정의는 안 되지만, 그것을 확신하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사랑은 우리가 결혼 할 이유가 된다.”
영화 끝 부분에 와서 주인공에게 행해지는 최대한의 존경의 표시인 만년필 증정도 소리 없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 노벨상 수상 장면에서 주인공이 답사에서 말한 결론적인 대목이 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저는 언제나 수를 믿어 왔습니다. 추론을 이끌어내는 방정식과 논리를 말이죠. 하지만 평생 그것을 연구했음에도 저는 묻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논리입니까? 누가 이성을 결정하는 거죠? 저는 그 동안 물질적인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와 비현실 세계에 빠졌다가 이렇게 돌아 왔습니다. 저는 소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그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발견입니다. 어떤 논리나 이성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한 사랑의 방정식을 말입니다. 나는 당신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 모든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인공의 아내와 같은 한 사람이 있는가? 우리 인생에 이런 사람이 주어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사랑을 우리 삶의 원리로 살 수 없을까? 어떤 종류의 사랑이 참 사랑이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일까?
사족
주인공이 계속 환상 속의 인물들과 싸우며 부딪치며 나누는 대화가 매우 유머러스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내면세계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영화 감독이 다빈치코드를 제작한 비기독교적 배경의 사람이라 그런지 영화 전체에서 어떤 기독교적 분위기나 사상이나 문화가 나오지 않는 것도 보인다. 위 주인공의 답사 대목에서도 신비한 사랑으로만 말해지지 그 이상의 형이상학적 존재의 근원인 신의 존재나 그 암시가 나오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감독이 비기독교인이며, 또한 모든 영화가 직선적으로 성경이나 기독교 사상을 표현해야만 기독교 문화인 것은 아니지만, 전혀 그 암시조차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와는 반대로 출간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니아 연대기'는 신학자이며,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C.S. 루이스가 쓴 판타지 소설로 그와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J.R.R. 톨킨이 이 작품을 본 뒤 '반지의 제왕'을 집필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나니아 연대기는 최근 영화로 제작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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