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서(4:1-17)의 말씀 묵상을 나눕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If I perish, I perish.)”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에스더의 고백이지만 이 고백의 무게가 어찌 그리 가볍겠습니까?
1. 모르도개(유다인)의 애통과 금식(1-3)
모르도개가 하만의 유다인 몰살의 흉계를 알고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에서 통곡합니다. 굵은 베옷은 결코 한국의 삼베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짙은 색의 염소 털이나 낙타털로 짠 옷인데 몸에 두른 다음 줄로 잡아맸습니다. 베옷은 고통과 슬픔의 상징이며, 특별히 장례에서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굵은 베옷을 허리에 두른 후,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끼얹으면서 슬픔을 표현하였습니다. 결국 겉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모든 행위는 총체적인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모르도개는 절체절명(絶體絶命,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게 된 막다른 처지)의 위기 앞에서 달리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결국 하늘의 하나님, 유다인의 하나님에게 애통과 금식으로써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동족 유다인의 생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도개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바른 영적 통찰력과 현실을 직시하는 분별력을 봅니다. 회개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구명(救命)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뜨거운 사랑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식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옷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용도였기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서 대궐 문 앞까지 왔지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며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도 오히려 그것이 내 발목을 잡으며 손해와 어려움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시간은 이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막을 내리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르도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동시에 왕궁에 있는 에스더의 주의를 끌고 연락할 기회를 얻으려 했습니다. 또한 여론을 조성하여 일반 백성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도 일시 장애가 있고, 어려움도 똑같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여기에서 믿음의 진정성과 인내가 시험 받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보면서 굳게 흔들리지 말고 서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됩니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전국에 반포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습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누운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이제 죽음밖에 그 아무 것도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이들은 하만의 흉악한 음모대로 몰살을 당할까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 사람들을 통해 교회를 진멸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공격합니다. 극심한 박해를 가하기도 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돈이나 명예 등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의 때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강한 대적의 공격 앞에서 우리의 지혜와 힘은 한없이 미약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구원과 위로를 간구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2. 에스더와 모르도개의 소통(4-11)
에스더의 하녀와 내시가 이 모습을 보고 에스더에게 알립니다. 에스더는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괴로워합니다. 모르도개는 에스더의 사촌이지만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에스더를 양육했기 때문입니다. 모르도개가 베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도록 배려하나 모르도개는 거부합니다. 에스더는 모르도개의 거부를 알고 내시를 보내어 무슨 상황인지 자세히 묻습니다. 위기와 절망, 죽음 앞에서도 공동체가 같은 관점을 가지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정직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관점을 바르게 알며, 영적 분별력을 갖도록 성령 안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도개는 내시에게 아주 자세히 모든 것을 사실대로 설명합니다. 모르도개가 매우 섬세하며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당한 모든 일, 하만의 흉계, 하만이 왕에게 바친 뇌물, 왕의 조서 초본 등을 다 알리며 전달합니다. 그런 후에 에스더에게 왕에게 유다인의 구명을 간구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간구와 회개, 금식은 동시에 똑같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지혜롭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것과 병행되어야 함을 봅니다. 1절에서 “모르도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란 말씀은 원문에서 ‘알고’에 초점이 아니라, ‘모르도개’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과 목적을 위해 가장 정확하게, 꼭 필요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시시때때로 위기를 당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대적이 강하고 상황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담대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또는 우리교회가 서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모르도개처럼 신앙 때문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하나님 나라의 원칙대로 살려고 할 때 직장이나 사업에서 반드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기도로써 살아계신 역사를 체험할 때입니다.
3. 하닥의 전언(傳言)과 에스더의 회답
에스더의 회답에는 왕궁의 법규가 있습니다. 그 당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왕의 부름이 없으면 나갈 수 없고 오히려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은 대제국의 왕을 향한 반역과 암살 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 규정은 왕후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게다가 왕후 에스더는 이미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지 무려 30일이나 되었습니다. 에스더의 말을 전해들은 모르도개의 대답은 섬뜩합니다. “너는 왕후라고 홀로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러나 네 동족 유다인의 위기를 외면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네 가문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오름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느냐?” 아주 강직하고 직설적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국 사람의 이상한 ‘온정주의’와 ‘내 가족 감싸기’나 “나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방식이 공동체를 멸망의 길로 이끕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神政) 공동체이며, 주님이 머리되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모든 불의, 부정, 악행은 강력하게 경고되어야 마땅합니다. 사랑은 공의를 기초로 합니다.
모르도개의 대답에는 단호하고 무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외면하고 자기 살 길을 찾는 이기주의에 대한 경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에스더와 그 가문의 멸망, 왕후의 권력과 자리를 향한 섭리 등입니다. 모르도개의 대답을 들은 에스더는 즉각 자신의 행동을 말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수도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모아 자신을 위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신도 시녀와 더불어 똑같이 금식한 후 규정을 어기고 왕에게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규례를 알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밝힙니다. 유다인들도 위기에 처했지만 에스더는 일부러 위기를 선택했습니다. 폐위나 죽음까지도 사양하지 않는 믿음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각각의 자리에 두시고 사명과 능력을 주십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자신의 사명과 능력으로 교회를 섬기지 않고, 혈기나 명예 또는 권력과 파벌로 교회 생활을 한다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모르도개와 자기 민족의 생명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한 몸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개인의 안위를 넘어 교회의 평안과 승리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때론 죽음을 각오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내부에서부터 지리멸렬하게 흩어지고 파당으로 분열되며, 자기 고집과 주관만 내세운다면 교회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충만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보존하시고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어떤 위기와 시련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귀찮다고, 힘들다고 영적 전투를 외면하는 것은 불충성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대적의 공격을 받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금식기도하며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위기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능력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심을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물론 승리를 거두기 전에 큰 고난과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때 에스더와 같은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각오와 결단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충성은 반드시 승리를 가져옵니다.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거느린 왜 수군을 물리친 명량해전을 준비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에스더가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환경이나 상황에 대한 염려 또는 내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결단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나와 가정의 문제 또는 교회의 문제 앞에서 얼마나 기도했는지요?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였는지요? 죽을 각오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적 전투를 맞이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단 한 번도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은 교회가 어떻게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며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한 주간에 마음을 쏟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회개하며 금식기도를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주님의 교회는 이 한 주간만이라도 함께 모여 합심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