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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탄자니아, 케냐)

주님, 제가 선교사입니다! (Yes, I am a Missionary!)

by Visionary 2023. 3. 10.

제가 생각하는 선교사로서의 모든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1. 선교의 본질과 선교사의 정체성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선교가 아닙니다. 최고의 사명도 또한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우선이 되는 것은 복음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선교, 선교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복음이 없는 선교,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지 않는 선교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의 일이나 과업 또는 사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선교는 사업이나 경영 또는 이벤트가 결코 아닙니다. 문화 경험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선교의 출발점과 대상은 선교사인 바로 나 자신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하며,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후에 오히려 자신은 버려진 바가 될 것을 두려워한다."는 고백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교사로서 제 자신에게 먼저 선교하며, 나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철저히 붙들어야 선교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이것이 가장 치열한 선교 현장의 영적 전투이며 영원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끊이지 않는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대형 프로젝트의 수행과 그 재원 마련에 선교사의 모든 열정을 걸거나 마치 목숨이 달린 듯이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그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보시는 내 삶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외국의 타문화권에 가족과 함께 거주하며 사역하는 선교사는 한국에 있을 때 경험했던 모든 제도와 모임, 감독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면 선교사의 생명은 죽는 게 당연합니다.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늘 선교사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은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격려하고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선교 사역은 당연히 열매를 맺습니다.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생명이 흘러갑니다.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마세요. 자꾸 선교의 일과 건축, 프로젝트, 재정만을 말하는 선교사는 위험합니다.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의 선교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충만히 거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돌봐야 합니다.

 


2. 선교의 이유


제가 케냐 오지인 현재의 사역지를 선정할 때 교회가 많이 존재하며, 사역의 접근성과 환경이 나은 도시 지역을 선정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처럼 이미 남이 전한 복음의 터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오지 사역은 여러모로 어렵고 힘듭니다. 지난 선교 편지에도 썼지만 오지 사역의 큰 장애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지라는 지역과 공간 자체가 접근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프리카의 오지는 여러분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입니다. 일부러 오지를 선택하며 지도를 보고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을 때 가장 적절한 선교지로 현재의 삼부루 카운티(삼부루는 현지어로 '나비;butterfly'란 뜻)로 인도하셨습니다.

지도를 보니 첩첩산중으로 목적지까지 고산 지대가 계속되어 접근이 힘들게 보였습니다. 제 사역지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2천 미터를 넘는 고산지대가 이어집니다. 그런 고산이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고산지대를 벗어나면 사바나 기후의 반사막 광야지대로 접어듭니다. 360도 사방을 둘러봐도 광야말고는 보이는 게 없습니다. 모든 도로가 비포장으로 그나마 원래부터 정상적인 도로로 개설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차량이 다니기에 좋은 길을 선택해서 만들어진 길입니다. 자갈, 진흙 구덩이, 암반으로 연속된 길입니다. 잘 닦여진 비포장 도로가 아닙니다. 시속 10-40 킬로미터로만 가야하는 도로입니다. 얼마나 길이 험한지 다녀오면 전신 근육통과 몸살로 며칠 끙끙 앓습니다. 처음엔 길을 못 찾아서 조난을 당했다가 겨우 현지인을 만나 빠져나온 적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언어 소통도 지리나 위치보다 훨씬 더 큰 장애가 됩니다. 공용어가 통하지 않는 부족어의 장벽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부족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나 자료, 교육 기관이 없습니다. 통역을 거치는 것은 의사 소통의 한계를 가져옵니다. 제 은사인 가르침, 지혜와 지식의 은사가 이 장벽 앞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울러 오지 특유의 문화가 가져온 폐단과 악습도 장애가 됩니다. 조혼, 여성 할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한 몇 년전부터 심해진 가뭄은 유목 부족 사이의 목초지 쟁탈과 가축 약탈을 가져왔고 이것은 주변 국가에서 불법으로 유입된 총기 사용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총기 강도는 가축뿐 아니라 사람도 해치고 파출소를 습격하며, 치안 안정을 위해 배치된 경찰관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제 사역지는 총기 강도의 영향권에 직접 있지 않지만 바로 옆 동네이며 최근 강도의 활동 지역이 확대되어 제 사역지에도 출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외부 환경이나 모든 상황은 선교할 이유가 젼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선교해야 할까요? 딱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교의 소원이 제게 나타나며 저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곳에도 사람이 살며,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야 할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누군가는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이것은 거룩한 낭비이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경제 법칙은 통용될 수 없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얼마나 힘들고 어렵느냐가 선교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역의 가능성이나 접근의 편리성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교사인 내게 말씀하신 삶의 자리, 사명의 현장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든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편하고 힘들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가지 고통이나 질병, 생명의 위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오직 그것에 삶의 기준과 방향, 방식을 둡니다. 순종할 때 기쁨이 있고, 감사와 은혜도 있습니다. 편하거나 평탄하고 형통해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역설이고 모순이지만 주님 오시기 전에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모순된 두 가지 현실입니다.

3. 선교의 목적

선교의 본질과 목적은 당연히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를 삼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원칙이 선교 현장에서 사라지고 망각됩니다. 보고하며 보여주고 알려야 할 드러난 가시적인 일이 선교의 본질적인 사역을 대신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파송한 교회나 단체에서도 그런 것으로 선교를 검증하려 합니다. 드러난 실적이나 보고로써 검증되지 않는 선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결국 당면하는 재정 후원의 압력 속에서 선교사는 본질을 외면하고 가시적이며 보여줄 수 있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선교를 후원하며, 선교사에게 압력을 가하는 모순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영혼의 구원이나 영적 성장과 변화, 지역사회 공동체의 문화 변화는 가시적으로 보여주거나 수치 또는 사업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몇 달 또는 몇 년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 선교사가 은퇴하고 철수하기까지 전 생애를 드려야 가능한 열매입니다. 어쩌면 그런 뜻을 품고 선교를 했어도 자신의 시대에는 그 열매를 보지 못하고 철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선교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작은 도토리 한 알에 수 천 그루의 커다란 참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또 다른 사과나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사람을 세웁니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멀리 보고 긴 호흡으로 인내해야 가능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