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늘 새벽은 빛의 전령사로 찾아온다!
  • 당신의 삶, 생명의 증거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절규
기독교/목회

나의 목회는 성공적인가?(퍼온글, 정성민 목사)

by Visionary 2008. 6. 23.
 [도입]
첫째, 나처럼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도 성공적인 목회자일 수 있는가?
둘째, 목회에서 실패란 무엇인가?
셋째, 목회에서 성공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지금까지 경험한 대부분의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강조하는 것을 정리해 보았다.

[일반적 개척교회 성장전략]
1. 시장조사(마케팅) - 가시성과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2. 자체건물 - 상가건물보다는 작은 조립식 건물이라도 자체건물이 있어야 한다.
3. 사회학 - 동질단위 원리의 개념. 비슷한 사람이라야 서로 호감을 느끼고 비슷한 사람들이라야 설득하기가 쉽다. 의사가 의사를, 교사가 교사를, 기술자가 기술자를,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잘 전도한다.
4. 주는 법칙 - 주는 교회가 성장한다.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므로 준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
5. 경건함 -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6. 설교 - 잘 준비한 설교한편은 곧바로 교회 성장과 직결된다.
7. 교육과 훈련 - 말씀훈련 커리큘럼이 명확하게 준비되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 과연 성공적인 성장을 보증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목회의 성공’이란 곧 교회 출석자들의 증가를 의미하는가? 궁극적인 '성공'이란 아주 크고 늘 성장하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이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목회에서의 성공이 마치 세상에서의 성공과 똑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이것을 성공이라고 정의한다면 성공적인 사업가나 성공한 운동선수, 성공한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건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는 세속적인 생각이 교계 안에 물들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과연 목회에서의 성공은 무엇이란 말인가?

1. 성공은 충성이다.

“사람이 마땅히 나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1~2)
나는 성공 증후군이라는 유혹적인 덫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바로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모세는 갈증에 목이 타는 백성을 대하며 혹독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나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나도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나와 나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민20:3~4).

모세와 아론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다.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8절)

하지만 모세는 불평에 가득 찬 그 수많은 무리들을 보며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회중을 모은 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나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10~11절)라고 말했다.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온 것은 엄청난 성공이다. 기적이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반석에서 뿜어져 나와 200만 명의 사람들과 가축이 마셨다. 그것도 양껏. 아마도 모세와 아론도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로부터도 함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들은 또다시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목회에서 또 하나의 대성공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세는 실패자였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모세는 바위에게 명하는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한 채 대신 바위를 두 번 내리쳤던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만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그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이것을 볼 때 세상에서 목회에서 크게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패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의 본보기로 추켜세워지고 자기 교회 교인들로부터 열렬한 칭송을 받으면서도 사실은 실패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가 이렇게 비참하게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자세는 각자의 사역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들이 다 적용해야 할 필수 사항이다.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하게 순종할 때만 찾아온다. 요즘 젊은 사역자들은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가정을 희생시켜 자녀들이 반항아로 자랄 수 있다는 경고를 지나치게 받은 탓인지 도무지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 것 같다.

목회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게으름을 피울 여지가 충분하고도 많다.
예수님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계속 일하셨다. 나가 충성스런 종이라면, 나 역시 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종들의 인간적 성정 즉 그들도 인간이므로 몸을 돌보아야 하고 적절한 휴식과 휴양을 취할 필요성이 있음을 충분히 인정해 준다. 그러나 충성된 종은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자일 것이고 또 필요한 경우 심신이 지쳐 있을 때에도 일하는 자일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7~29)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공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충성된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에 능한 자라야 만이 순종과 충성을 다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 성공은 섬김이다.

예수님의 공사역이 끝나갈 무렵 사도들 사이에 추한 경쟁 심리가 퍼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다가올 나라에서 그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겠노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 열심이었음을 본다. 이것을 열 제자가 보고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마20:24) 모두가 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말을 분으로 들어낸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은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런 다음 말씀하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요13:14~16) ' 더 큰 자'(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가하다면 '작은 자'(나)도 당연히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희생과 봉사는 한물 간 덕목이다. 우스갯소리도 '아골골짝 빈들에도 골라 잡아가는 상황'이다. 모두들 높은 자리에 앉아 명령만 내리고 싶어한다. 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 한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영생을 주기 위해, 육신의 건강을 증진시켜 주기 위해, 몸을 귀하게 해 주기 위해, 권력을 확장시켜 주기 위해, 지위를 높여주기 위해,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의 말씀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 오히려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목회자는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절대.

예수님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이 섬김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의 섬김의 궁극적인 표현은 바로 십자가였다.  내가 어떤 종류의 섬김의 길을 가든, 종이 되고자 하는 자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종 된 삶에서 최절정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러므로 내가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나의 눈이 십자가를 계속 행하고 그 분의 삶을 닮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목회자가 교인들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교인들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기도 그리고 행정과 목회상담을 통해서 일 것이다.

3. 성공은 사랑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의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식사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3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고 곧 새롭게 목회를 시작할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베드로에게는 이런 상황이 매우 고통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님을 부인했던 대제사장의 집 앞뜰에 피워져 있던 것과 같은 상황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조용히 대답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절)

베드로는 주께서 사용하신 '아가페'적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할 자신이 없었다. 주님을 부인했던 경험이 혀를 굳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 대신 그는 '필리아'적 사랑 즉, 우정,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말을 대신 사용해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실 땐 베드로가 사용한 '필리아'(친구의 우정)적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사랑의 고백을 베드로로부터 받으신다. 이 세 번의 질문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목회적 사명을 맡기신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목회자의 인생 최고의 우선 순위이다.
모든 신학자, 모든 목회자, 모든 선교사에게 첫 번째 던져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을 제쳐놓고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 가지 생각의 도출]
첫째, 대형 교회를 목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사도 있을 수 있다.
둘째, 완벽하게 계획되고 거행되는 예배를 설계하고 인도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통찰력 있고 성경적이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설교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넷째,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책을 쓰면서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이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지도자들 중 몇몇의 삶에서도 이런 그릇된 우선 순위의 면면들이 드러날 때가 있지 않은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큰 교회를 담임한다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작은 교회를 담임하면 들 사랑하는 것이 아니질 않는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거나 유명한 국외신학 대학에서 공부하며 혹 장학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어떤 유리한 점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우월감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신학대 학장이나 총회장으로부터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긴다고 볼 수 있는 사찰집사들까지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져 있다. 이는 평등주의적 부르심이다.

나는 앞으로 나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나 자신을 바치기로 작정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절대 정직해야 한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요21:17) 베드로가 사용한 '알다.'라는 단어는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주님은 저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저는 결코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의식적이고도 내적인 능력을 열심히 개발시켜야 한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의식적이고 내적인 고백은 두 사람의 사랑을 식어지지 않도록 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 만약 내 아내가 결혼 18년 동안 내게 아내의 도리만을 꿋꿋이 하면서 한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결혼18년의 사랑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분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성장시켜갈 것이다.

셋째로, 그분과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더욱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기도의 시간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4. 성공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라고 믿음의 중요성에 관해 성경은 말한다.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이 없으면, 나가 제 아무리 큰 일을 이룬다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없이는 성공도 있을 수 없다.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위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는 것.  2)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이 두 가지 확실한 믿음의 요소가 있어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질문]
-나는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솔직하게 대답하라.
-나는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는가? 역시 솔직하게 대답하라.
-나는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그들 편에서 현실적으로 선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진실하게 대답하라.

5. 성공은 기도이다.

한 청년이 벌목 현장의 작업 주임에게 다가와서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주임은 "그건 자네하기 나름이지. 어디 자네가 이 나무를 베는 것을 보기로 할까?"라고 말했다.
그 청년은 나무 앞으로 걸어 나가 익숙한 솜씨로 큰 나무를 베어 넘겼다.
의외의 솜씨에 놀란 주임은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하게"라고 소리쳤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이 지나 목요일 오후가 되었을 때 현장 주임이 청년에 다가와서는 말하길,
"오늘 일이 끝나는 길로 자네 급료를 받아 가지고 가게"라고 했다.
청년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급료는 금요일에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보통은 그렇게 하네만, 자네 실적이 뒤떨어져서 자네를 오늘 내보내기로 했네. 작업 일지를 보니 자네 실적은 월요일엔 첫째였다가 수요일엔 제일 뒤떨어졌더군."
"하지만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청년은 항의했다. "저는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마지막까지 일했고 심지어는 휴식 시간에도 일을 했습니다."
그 주임은 그 청년의 성실성을 알고 있는 터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자네 도끼를 갈아서 쓰고 있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도끼를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점점 무뎌지는 연장으로 나무를 패고 있다.  

나는 기도해야만 한다.

첫째로, 기도가 나에게 끼치는 효과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를 노출시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사랑, 그분의 지혜, 삶과 사람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방법의 상(像)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다.
출34:29~35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노출되어 얼굴에서 광채가 날 정도였다. 나는 그분의 생명이 나의 삶 안에서 불타오르고 나의 뜻이 그분의 뜻에 맞춰지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는가?

둘째로, 기도가 교회 안에 끼치는 효과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교회와 사역에 힘을 공급해 준다.

셋째로, 주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기도 하셨지만, 그래도 혼자 계실 필요가 있었다. 비록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기는 했어도,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나는 사역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주님과 같이 나도 규칙적으로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하셨다면 양자된 나는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나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성령께서 기도하도록 나를 격려하시며 심지어 나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기에는 내가 할 역할도 있다. 기도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빛에 나의 영혼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내가 기도함에 따라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나의 생명 속에 새겨 넣어 주시고, 나의 의지는 그 분에게 끌려가 삶의 칼날을 예리하게 세우게 된다. 그리고 기도는 단지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공으로 행하는 길에 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6. 성공은 거룩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하신다.(레19:2) 거룩은 참 성공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한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삼손만큼 큰 기대를 받으며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탄생은 천사에 의해 여러 번 고지(告知)되었다.(삿13장) 자라면서 그는 주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 때 삼손은 자신의 거룩한 나실인 서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육욕(肉慾)에 사로잡혀 성적(性的)인 사랑에 열정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는 죽은 사자의 사체(死體)를 꿀을 먹기 위해 만졌고,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면서 독주까지 마셨다. 결국 들릴라의 유혹에 눈이 멀어 머리카락까지 밀리고 육의 눈까지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을 삿16:20절에서는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얼마나 끔찍하고도 끔찍한 선언인가! 그리고 이 선언은 오늘날 일부 사역자들의 사역상 묘비명에도 기록되고 있다.

삼손의 실패는 사방이 성적 유희 투성인 세상 문화 속을 살아가는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의 경고다. 그리고 목회자인 나에게 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나는 현재의 악한 세상에 의해 도덕적으로 둔감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성(性) 윤리가 이완되어 있지는 않은가?
둘째, 할 일이 없어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인터넷을 클릭할 때 어느 기사와 사진을 우선적으로 클릭하고 있는가? 하루에 TV를 몇 시간이나 시청하는가?
넷째, 지난주에 성경을 몇 장이나 읽었는가?

다윗 왕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타락했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최정상의 절정에서 타락하고 말았다. 신명기 17장은 왕들이 다음 세 가지를 삼가야 한다고 명령한다.
첫째, 말(馬)을 많이 두지 말라(16절). 둘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17절). 셋째, 은금(銀金)을 많이 쌓아 두지 말라(17절).
다윗은 첫째와 셋째 조항은 잘 지켰으나, 상당수의 후궁들을 둠으로써 두 번째 조항을 지키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로 인해 다윗은 관능적인 욕망을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점진적으로 둔감해졌고 생애 최대의 치명적인 죄악에 빠져 들 길을 스스로 열어 놓은 것이다.
‘한번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면, 하나님은 나에게 아주 비현실적인 분이 된다.’는 경구(警句)를 명심해야 한다.

다윗은 철저하게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얻은 아기가 죽었고, 다윗의 아름다운 딸 다말이 이복 오라비인 암논에게 강간당하였으며, 뒤이어 암논이 다말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에게 살해되었다. 아버지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압살롬의 증오는 다윗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밧세바의 할아버지 아히도벨의 후견 아래 반역을 일으키기고 결국 아들 압살롬까지 잃고 만다.

다윗의 타락은 하나님을 좇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도 음울한 경고가 되고 있다. 거룩함 없이는 성공도 없다. 절대.
나는 이 시대의 외설적인 문화에 점점 이끌려 내가 받은 바 거룩하라는 부르심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된다. 거룩 중에서 성적인 정결함만 한 거룩함은 없다.

7. 성공은 긍정적인 태도(자세)이다.

기독교 사역에서는 태도야말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관건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물론 어느 정도의 상식적 자질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특히 실패한 목회를 특징짓는 두 가지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부정(否定)주의(主義)와 시기(猜忌)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 상태로 구속이 되자, 성숙치 못하고 이기적인 자칭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기 개인의 탁월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리고 바울은 신학자들 간의 증오와 반목의 희생물, 또한 다른 사람의 영향력과 능력을 시기하는 교회 사람들의 악의적 희생물이 되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까지 있었다.(고후 12:7,8)
그러나 바울은 이런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참고, 빌1:15~17) 바울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말을 한다.

목회의 경력이 쌓여가니 때가 되어 시찰, 노회 일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들 사이에서 이런 ‘악성 부정 비판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나는 동료 목회자들과의 관계에서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을 피우는 것처럼 훌륭한 결과를 이루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긍정적 태도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태도가 진정으로 성공적인 목회의 근본 요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적용]

- 세상적인 성공이라는 비참한 멍에가 그렇게 무겁게 하나님의 종들을 짓누른 것은, 결코 성공이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지게 하신 짐이 아님을 증명한다.
- 나는 성공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로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공적인 목회를 한 후 결코 편안한 여생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오히려 그들은 순교자가 되었다.
심지어 바울은 예언하는 두 여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당할 것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통스런 그 길을 마치 자신에게 정해진 길 인양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며 당당하게 예루살렘 행을 택했다. 성공과 실패, 그 확실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장차 임할 영원한 세상에서 밝혀 질 것이다.
- 목회 사역에서도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결코 교인 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역할에 최선을 다하느냐가 바로 성공을 결정짓는 것이다.
- 나는 성공을 양적(量的)인 기준, 예를 들어 교인이나 제직의 규모, 자기가 전도한 사람의 수, 자기가 펴낸 저서의 수, 학벌, 영향력과 명성이 미치는 범위 등으로 측정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성공에 대한 요점정리]

1. 나는 목회 사역을 하면서 나의 충성됨(신실함)을 입증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개인적 또는 공적 사역에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 여겨지는 영역이 혹시 있지는 않은가? 나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2. 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종 된 자리에서 스스로를 섬기는 자리로 부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성공에 근본이 되는 질문이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질문 한 가지는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심으로써 이 질문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표현하셨다.(요21:15~17 참조) 나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직접 배우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4.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모든 피조물의 목표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상주시는 분으로서 그분이 나에게 정당하게 상급을 내리실 것을 믿는가? 진심으로? ‘예’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이 바로 참 성공이다.

5. 나는 기도의 사람인가? 나는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의 필요와 교인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낱낱이 고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나의 기도 생활은 성공으로 가고 있는가, 실패로 가고 있는가?

6. 나의 삶은 거룩함 가운데 장성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세속 문화의 포로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거룩함을 기준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성공 쪽으로 분류하시겠는가, 실패 쪽으로 분류하시겠는가?

7. 나는 목회 사역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내가 취하는 태도 중에는 성공을 배격하는 태도들이 있다. 바로 부정적 자세와 시기심이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일들을 이루었어도 결코 완전한 성공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들, 남을 격려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체가 하나의 성공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