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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장)

by Visionary 2012. 6. 11.

그리스도인 특히 전임 사역자들에게 던지는 주님의 한 가지 물음(요 21:15-23)

(도입) 
1. 우리는 나 자신을 아는가? (영성의 출발점에 대한 도전)
- 착각(부분, 왜곡되고 과장된 모습, 남이 말하고 인정해 주는 내용)
- 실제(현실의 삶에서 나 자신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깊이 탐구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음)
- 회피(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 치유되지 않고 있는 과거의 아픔, 자신의 성찰 자체에 대한 불필요와 무감각)

2. 신앙과 삶의 실체
-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한 성숙

3. 미성숙한 신앙과 인격, 삶의 모습
- 성도로서의 나 자신과 세상 속에서의 나 자신이 분리 또는 온전히 통합되지 못함.
- 성도로서의 자아상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없음. 단편적이며 순간적임.
- 결국 오랜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성숙이 없음. 자아를 내세우며, 세상의 가치대로 산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지 못한 인격이 고정되면 변화를 불편해 하고 거부하게 됨. 타협하는 회색신앙의 껍데기 속에서 살아가게 됨.

4. 참된 성숙의 

- 영적 여정의 전체를 보며, 일관성 있는 주님과의 교제 및 자아성찰
- 실패와 좌절,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과의 생명력 있고 인격적인 교제의 재료가 됨.
- 이를 위해 우리 영혼의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함. 모든 사건과 환경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점과 통찰력(어떻게 주님 앞에서 내 자아상의 성숙을 이루며,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관계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예) 사업의 부진과 실패, 자녀문제로 인한 고통, 육신의 질병, 뜻하지 않은 사건사고, 교회 내 인간 관계의 갈등, 해결되지 않는 문제, 오래도록 평안이나 기쁨이 없는 심령

(본론) 1. 주님과의 첫 만남 

베드로(페트로스), 본명은 시몬, 게바(아람어로 반석)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페트로스가 된다.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벳세다에서 태어나 가버나움에서 살았다. 그는 안드레와 형제였고, 어부로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일찍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베드로는 정상적인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기본적인 교육만 받았던 사람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 짧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늘 앞서가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닷가에서 길러진 뱃사람으로서의 야성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적극적인 성격이 지도자로서의 기질로서 인격을 훈련시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게바는 수리아 말로 헬라어의 베드로와 같은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석'은 무게가 있고 든든하며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베드로의 성격과 기질에는 맞지 않는 말씀이다. 다혈질이고 충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회당에서 보고 들은 율법에 관한 지식 이외에 사도 바울처럼 정식 교육 기관을 통한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었다. 이런 베드로가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해 이미 과거에 한 번 스쳐 지나가듯 소개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인격적인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에게 주신 잠재력과 그를 쓰시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는 그의 배에 오르셔서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지라는 말씀을 주셨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는 낯선 사람의 말에 그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엄청난 풍어 사건을 경험했다. 바로 이 때 풍어로 인한 물질의 풍성함과 만족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 분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갈릴리 호수도 통치하시며 고기까지도 아시는 분이심을 보는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렸다. 그 앞에서 갑자기 보이는 자신의 죄성과 그로 인해 굴복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경외심. 바로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다. 생선 비린 내 나는 손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게 되었고, 주님도 그의 손을 붙잡아 주셨다.
- 거룩한 부르심(죄와 성별의 관점), 영광의 부르심(하나님의 자녀 및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 은혜의 부르심(우리의 조건이나 환경, 삶, 됨됨이와 전혀 관계가 없는). 
- 인생 자체가 그리고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완전히 바뀜.
- 베드로의 압도당함, 자기 인생을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 굴복시킴. 어설픈 복음이나 불분명한 복음은 주님에게 자기 인생을 의탁하고 주님 앞에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불가능하게 한다.

2. 공동체 신앙 여정 (개인이 아닌)

- 제자 공동체에서 온갖 신앙 훈련, 일상 생활이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의 신비와 위대함에 대한 매우 작은 깨달음이 있다. 이제야 공동체가 무엇인지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함. 제자들이 오순절에 다락방 모임에서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와 신약교회의 탄생을 통해 참된 능력과 사역을 시작했지만 사실 그 기초는 바로 이 시절의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때때로 그렇게 힘들어하고, 시험 들고 낙심하며 떠나버리길 원하는 바로 이 비천한 공동체에 주님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천사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성숙되지 않는다. 바로 나처럼 추하고 교만하고 악한 존재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그 은혜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공동체에서 주님은 모질고 교만하며 악한 우리를 깎으시며 빚으시고 다듬으신다. 떠나지 말라. 주님이 이 공동체를 완전히 버리셨다는 확증이 없으면 포기하지 말라. 우리의 성숙을 위한 최선, 최적, 최고의 현장은 공동체 경험이며, 공동체 내부의 상호관계이다.
- 신앙 고백(위대한 전기, 직후 엄중한 책망,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반응)
- 실패와 좌절, 교만, 상처.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 분을 잘 몰랐던 사람의 경험이 아니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선하고 좋은 경험, 은혜만 있을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사실 진정한 신앙은 격렬한 회의와 고민, 감당할 수 없는 유혹과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을 통해 든든하게 세워진다. 신앙은 만사형통의 요술상자가 아니라 매일 직면하고 싸워야 하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이다.

3. 견고함과 성숙

- 신앙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영적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 그러나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신앙의 전기가 반드시 한 번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주로 인생의 절대절명의 위기,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통해 경험됨. 우리 인생의 풍랑과 절망은 은혜와 성숙의 과정이 됨.
- 야곱(얍복강가), 아브라함(모리아산), 모세(사막의 가시나무 떨기), 요나(큰 물고기 뱃속)
- 완전한 깨어짐과 완전한 의탁의 순간(자아의 주권을 하나님에게 비로소 양도하는 순간)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의 과거와 출발점을 아느냐?, 너 자신을 알라)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주님과 나의 참된 인격적인 관계이다. 진정한 영성의 핵심이며, 자아 성찰의 목적이다. 
- 내 양을 치라, 먹이라! 자아 성찰과 진정한 영성으로 주님에 대한 참 사랑이 세워질 때 비로소 참된 사명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형제, 자매는 억지로 사랑되지 않는다.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더욱 많아서 그렇다. 예수님의 사랑이 내 심령을 사로잡을 때 모든 지체들을 놀랍게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나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품이 전혀 없다. 베드로는 처절한 실패와 주님에 대한 철저한 부인을 통해서 자기의 실상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붙들겠다는 주님이었는데---. 나는 상당히 다른 제자들보다는 무엇인가 잘났고 뛰어난 줄 확신했는데---.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토록 견고함과 성숙은 결정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내 인생의 실패와 절망, 고난을 통해서 이뤄진다.
- 근심하여, 엘루페테(슬퍼하다, 슬픔의 상처를 입는다). 우리의 내적 치유, 신앙의 성숙은 깊은 슬픔과 상처를 통과해야만 한다. 얄팍하고 감상적인 흥분으로는 안 된다. 성숙을 위한 주님의 역설 ‘진정 슬퍼하라, 깊이 슬퍼하며 상처 속으로 들어가라.’ 진정한 인격 성숙, 내면세계의 성숙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의 슬픔과 상처, 자신에 대한 좌절을 분노로 해결하지 말라.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을 하지 말라. 시간이 약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체념의 늪 속에서 평생을 허우적거려서도 안 된다. 싫고 두렵지만 슬프고 아프기까지 하지만 직면하라. 그러면 주님의 완전한 용서와 치유, 회복과 은혜가 있다. 
-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주님께 자신을 맡겨 비운 사람에겐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이나 그에 대한 권리가 없다. 이것이 최고의 자유이며 능력이고 기쁨이며, 평안이다.
- 에피소드 (요한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결론) 주님은 왜 베드로를 버리시지 않으셨는가? 그의 실패와 교만, 상처를 왜 사랑으로 받아 주시며, 치유하시고 오히려 성숙과 새로운 소망으로 다시 주님을 위해 사역하도록 만드셨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목적이며 뜻이기 때문이다. 혹시 내 인생과 신앙의 여정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지내왔다면 지금 마음의 귀를 열어 내 이름을 부르시며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버리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이다. 이제 유치하고 열매 없는 신앙을 버리고 성숙한 내 자녀가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네 자신이 나에게 누구인지를 항상 생각하고 잊지 말아라.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자신의 죄성이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다. 그는 정말 평범했고 무식했으며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비천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그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막힘없이 힘 있게 복음을 전했을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고 말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의 그 같은 평가는, 학문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던 베드로를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베드로의 가르침이 너무도 충격적일 만큼 논리 정연하고 완벽하며 감화력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랍비 학교에서 수업을 받지 않은 자가 신학적인 논쟁이나 율법에 관한 견해를 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히 복음 전파의 일선에서 역동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다. 분명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나라 건설의 역군으로 세움 받기 전까지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천시 받던 어부 출신이었으며, 갈릴리 변방의 한 촌락에 거하는 소외된 인생에 불과했었다. 

이처럼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기꺼이 그를 제자로 삼아 주셨다.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자를 택하여 영광스런 일꾼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드로를 강하게 붙잡아 주셨다. 베드로는 원래 성격이 급하고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던 자였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환경과 세상에 전혀 내세울 것 없는 지위와 신분으로 인해 겸손한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베드로가 아무 자랑할 것 없는 환경을 만나게 된 것은 그의 평생을 놓고 볼 때 오히려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갈릴리의 비천한 인생들 틈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던 베드로는 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짙은 인생의 체취를 맡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억들은 베드로가 훗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이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안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젠 우리도 온갖 분주함 또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진지하고 엄숙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던 삶을 미련 없이 버리자.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내 참 모습을 확인하고 늘 그 분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자. 그래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 놀라운 평화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더 이상 세상의 것들이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지배할 수 없다. 

그래야 더 많은 비움과 포기, 의탁의 결심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집착으로부터, 성공으로부터, 선한 욕심으로부터의 자유를 되찾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여러분도 그 음성을 듣게 되길 소망한다. 그 기쁨과 자유함으로 남은 삶을 아름답고 편하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하나님 나라와 내게 맡기신 영혼들을 가슴에 사랑으로 품고 살아가는 넉넉한 사람들이 되길 축복한다.

(묵상과 기도)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주님은 내게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시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2. 지금껏 살아온 모든 삶과 신앙의 여정에서 과연 나는 내 참 모습을 깨닫고 진정한 성숙의 길로 달려왔는가?
3.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사명과 사역을 위해 기쁨과 평안함으로 살아가며 쓰임 받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