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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성탄절 - 세상 속으로 내려가기

by Visionary 2007. 12. 21.
  이제 성탄절이 코앞에 닥쳐왔다. 그래봤자 요즘도 분명 교회의 성탄절은 세속의 크리스마스란 유흥절기와는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한 기념과 축하 및 그 사랑과 겸손의 실천이란 알맹이가 다 사라진 듯 하다. 계륵(鷄肋)이라고 했던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성탄절이 꼭 그런 형상이 되어버렸다. 그냥 건너뛰자니 도저히 그럴 수 없고, 하자니 늘 똑같다. 물론 예전 60년대까지의 소박한 축제 분위기도 아니며, 어정쩡하게 아이들의 유희를 보는 날로만 지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우리는 성탄절의 참 정신과 삶을 복원시키며, 이 땅에 오신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 희생을 실천할 수 있을까?

  "다윈의 진화론은 세속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세속주의는 서구사회를 휩쓸었고 교회는 이 세속주의에 대한 성경적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양상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세속주의의 종교적(필자 삽입) 적용으로 나타난 자유주의이며, 또 하나는 세속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는 헬라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따라 영적인 것만 선하고,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영적인 것에만 있다는 영지주의적인 패러다임이다. 일상의 삶은 영적인 것이 아니며,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만 영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도서출판 NCD, 정진우 외 공저, 84쪽).
















   


 

  성탄절의 참된 회복이 바로 여기에 직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예수님의 성탄절 정신은 한 마디로 성육신(Incarnation)의 삶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단순히 신학적 용어로 정의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면 우리가 쉽게 말하는 한 마디의 문장 -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 만으로 말하지 말자. 사실 성육신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 높이는 그야말로 우주적이며 또한 성육신의 주체이신 성자 예수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함과 신비를 갖고 있다. 이 성육신 사건의 정신은 그렇다고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다. 지극히 사실적이며 현실적인 삶의 실체이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자라나심과 공적 사역의 모든 과정마다 성육신의 정신은 매우 치열하게 곳곳마다 녹아들어 있다. 주님은 결코 단 한 순간도 성육신의 삶을 포기하시거나 잊지 않으셨다. 성육신 사건의 삶은 무엇인가? 구원을 위한 주님의 모든 것을 비우심과 포기이며, 죄인들과의 동일시를 넘어 그들의 삶에 종으로서 개입하시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고 불행한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바로 이 정신 때문에 주님은 창녀와 세리, 불의한 자, 강도와 장애인들의 삶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무슨 사회변혁을 위한 휴머니즘의 사회적 발로(發露)정도로 치부하거나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혁명투사만으로 어리석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주님의 성육신 사건과 그 삶의 실천은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이 영원부터 작정하신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 실천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부른다. 즉 복음과 구속사 및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주님의 삶을 사회적 정의 실천과 약자 및 소외계층을 위한 용기 있는 삶, 타자를 위한 박애주의만으로 말하는 무지와 만용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물론 소위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 아니 일부 복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도 또 다른 측면에서 성육신 사건과 삶의 실천에 대해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외면하고 오로지 주일 낮의 예배 모임에만 찾아오시며, 교회당 안의 행사를 통해서만 자기를 드러내시는 분으로 그 영광의 복음과 위대한 성육신 사건을 수치스러울 정도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차피 망할 세상이고 교회는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세상을 외면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고고(孤高)한 거룩함을 세속으로부터 지키려고 목숨을 걸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장망성(장차 망할 성)이 아니던가!




















    그러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세상 속으로, 세상을 위해 가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파송하신 사도들의 정신이며, 교회의 초석인 복음의 정신이다. 이 회복이 바로 성탄절 정신의 회복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목동에 있는 어느 침례교회의 목장(셀) 모임에 참석해서 그 교회의 자매가 말씀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육신의 실천은 자신의 아파트 평수를 줄이는 것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함을 듣고 도전을 받은 적이 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누림이 아니라 포기를, 군림이 아닌 섬김을 주님의 사랑으로 실천할 때에 바로 그것이 참 성탄절의 정신이며 모습이 아닐까?

  오늘 우리시대의 조국교회는 성탄절 정신의 핵심인 성육신의 삶에서 너무 멀어지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만일 성육신의 삶이 복음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실천된다면 세상은 우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그 증거하는 복음에 대한 역동적인 능력을 획득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하나님이 전도해 주시는 초대교회 같은 복음의 실천으로 인한 참된 교회 성장의 열매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만이 성탄절이 아니며, 성탄절이 12월 24일과 25일의 이틀간의 행사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땅에 죄인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오신 아기 예수의 성육신 사건의 삶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1년 내내 성탄절같은 교회들이 되기를 꿈꾼다. 신약교회의 회복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면, 우리는 복음의 사회적 실천을 통한 전인적인 복음의 회복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 2의 성탄절로 말할 수 있으리라! 제2의 성탄절 정신 회복과 실천을 위해 우리는 더욱 낮은 자리로 내려가자. 교회의 소유를 이웃에게 마치 준비된 사랑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듯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밖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종의 삶으로 아짇 믿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과 세상을 섬기자. 바로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이천년전에 오셨던 첫 번째 성탄절의 정신이었으리라! 우리의 성탄절이 제 2의 성육신 사건의 대행자이며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할 우리를 통해 실천될 때 다시 한 번 세상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짜 세상이 들어야 할 참되고 기쁜 복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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