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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목회

목사가 해도 너무 한다!

by Visionary 2020. 10. 18.

  앞부분 제목에 ‘나도 목사지만’이 생략되어 있다. 한국교회 목사의 타락과 변질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깊게 느끼고 있다. 일반성도들도 그렇지만 영혼의 지도자이며 목자로 부름 받은 목사까지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과 비상한 은혜가 절박한 시점이다.

  다른 것은 모두 제쳐놓고 목사의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동시에 본질적인 사역인 말씀 사역의 꽃이고 대표가 되는 설교에 대해 쓴 소리를 나누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의 설교에 대한 자신감이나 능력 또는 잘하고 못함에 대한 느낌이 결코 아니다. 일반적이며 객관적인 원칙을 정직하게 생각하고 목사와 일반 성도들 모두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가져야 할 창조적인 비판과 성경적인 분별력을 잘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눈다.

  읽기나 듣기 또는 공부, 선포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말씀에 대한 가장 바르고 아름다운 태도는 무엇인가? 아래 성경 구절이 그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1) 너그러워서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3)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1) 너그러워서 : 헬라어 '유게네스'는 비교급의 형태로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다.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고귀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진리에 대해 온 마음을 다했고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2) 간절한 : 헬라어 '프로뒤미아스'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 등의 뜻이며 '파세스'는 '모든'이란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

3) 상고(詳考, 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하거나 참고함) : 헬라어 ‘아나크리크’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등의 뜻을 포함한다.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審問)이나 광석의 정제와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뜻을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교,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들은 말씀을 성경에 비취어 신중하고도 정확한 조사를 하여 확인했다.

Now these were more noble-minded than those in Thessalonica, for they received the word with great eagerness, examining the Scriptures daily, [ to see] whether these things were so. (NASB)

  비난과 비판은 전혀 다르다. 맹신과 광신은 성경에 기초한 합리적이며 근거가 있는 신앙과도 완전히 다르다. 맹신에 기초한 맹종은 위대한 평신도를 무기력한 병신도로 만들어버렸다. 이 결정적인 책임은 목사에게 있지만 동시에 그 대상이 된 평신도들의 책임도 결코 사소한 것으로 간과할 수 없다. 무조건 믿거나 아무렇게나 믿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성경적인 신앙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교만이나 지성이 성경의 권위보다 앞서거나 신앙을 결코 대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은 정당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고 신앙의 영역에서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점을 무시했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개인의 신비 체험이나 드러난 외형적인 복을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 들였음은 심각한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라야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시대의 목사들이 설교 본문을 주보 기록용이나 봉독을 위한 장식품처럼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영광에 대한 중대한 죄악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고사하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 바른 해석과 선포마저도 외면하는 현실이 이 사실을 벌거벗은 것처럼 보여준다. 즉 이 시대 한국교회의 타락과 변질의 핵심에는 강단의 타락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세우지 않는 목사의 직무 유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가질 때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설교는 1)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2)바르게 전달해서, 3)(목사부터) 그 뜻대로 사는 또는 (성도들이) 살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목사의 기질이나 성향, 은사가 다르다고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이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무책임한 모습이다. 설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목사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거룩한 과업이다. 물론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그에 상응하는 동등한 책임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분별력을 가지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들었으면 그대로 살아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주일에 교회당에 올 아무런 이유가 없다. 비록 지난 주일에 또는 한 주간을 지나며 주신 말씀에 그 누구도 완전한(perfect) 순종을 할 순 없지만 최선(best)의 순종은 가능하다. 그래도 안 되는 것,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며 은혜로 채우시고 능력을 주실 것이다.

  본문 설교에서 그 주제에 해당되는 내용을 얼마나 들었는가?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시하시려는 핵심을 우리는 설교를 통해 들었는가? 만약 30~40여분의 설교에서 본문의 주제가 단 5분도 선포되지 않았다면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의 권위 앞에서 심각한 직무 유기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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