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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

상처의 세계관, 사랑과 용납에 대해서

by Visionary 2012. 6. 11.
내면에 큰 상처를 가진 사람은 상처의 세계관이 있다. 자신을 향해서도 상처의 시각으로 보기에 자존감, 자아 정체성이 망가져 있다. 그뿐 아니라 외부(사람, 환경, 사건)을 볼 때도 상처로 해석한다. 그래서 부정적이며 공격적이고 항상 책임을 전가한다.

문제는 상처의 세계관을 갖게 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질병 상태에 있게 될 뿐 아니라,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사단이 그것을 먹이로 삼아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심령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교회에서 그 쓴 뿌리의 악한 영향력을 나타내어 교회의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trouble maker가 된다. 겉으론 열심도 있고, 멀쩡...해 보이고 신앙 행위도 괜찮은 듯 보이는 데 항상 인격과 삶, 성품에 문제가 있으며, 대인관계에서 그 병적 증상은 더 심하게 나타난다.

결국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 사랑, 능력으로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어야 하는 데 과거의 그 무섭고 아픈 상처를 직면하고 인정하는 게 무섭고 두렵고 너무 싫어서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게 대부분이다. 아니면 다양한 방어기제와 대체행위로 자신을 포장하며 치료와 회복을 대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한 사람을 살리며 세우는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를 사랑하고 용납하며 심지어 자기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죽는 길밖에 없다. 물론 일반적 차원에서 말씀과 기도, 은혜 및 성령님의 능력을 전제한다 해도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이 인격을 통해 또 다른 인격에게 전달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 사람을 살리며 세우신다.

비록 생물학적이며 신체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삶과 인격을 그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것이지만, 이 또한 고통스럽고 힘든 과업이다. 인간은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나름대로의 자존심 때문 살아가는 존재인데 이것을 또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며 죽는다는 게 쉽겠는가?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귀한 사랑이 없는지도 모른다.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내면에 한 영혼을 품고 생명을 주며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늘 십자가의 은혜로 죽어야 함은 마땅하다. 사실 전임 목회자야말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는 것 누구나 힘들고, 먹고 살아가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치열하고 힘들다. 모든 면에서 일반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인 목회보다 훨씬 더 힘들다. 그럼에도 목회가 모든 생업이나 일과 비교해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바로 이 특성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생업이나 일도 아무 조건이나 이해 관계 없이 자기 생명과 인격, 영혼을 내어주며 사랑하고 세우며 섬기지 않는다. 한 사람의 고통, 아픔, 슬픔, 상처를 무조건 온 몸과 영혼으로 평생 용납해 주지도 않는다. 만일 전임 목회자인데 이런 경험이 없거나, 목회가 일반적인 직업이나 일에 비교해서 가장 쉽고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일이나 직업, 프로그램으로만 하고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일이나 환경, 직업도 힘들지만 인간 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정답이 없는 게 바로 인간 관계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 상담학적 용어로 성인아이(Adult child) - 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며 세우고 온전케 함이 어찌 그렇게 쉽고 단순하겠는가?

여기에 정답이나 지름길은 없다. 주님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나아가서 오직 은혜로 나를 먼저 죽인 후 하나님이 하시도록 간구하는 길밖에 없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공간이 확보되면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못 박아야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 그 능력과 역동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매일 새벽의 가장 중요한 두, 세 가지 기도 제목 중 하나이다. 성도들이 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면 나 또한 그 상처의 포로가 되며, 그 상처준 사람에 대해 나도 상처로써 공격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 아니 나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상처는 별이 될 수 있다(Scars into stars). 과거에 상처를 입었던 사람도 치유자가 될 수 있다(Wounded H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