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늘 새벽은 빛의 전령사로 찾아온다!
  • 당신의 삶, 생명의 증거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절규
기독교/교회론

우리가 상실한 교회의 본질(2)

by Visionary 2020. 5. 27.

생명을 위한 중보 사역

  인기와 돈, 명예로 행복할 것 같은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을 보며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자살했을까?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 사회 현상 속에서 어떤 영적 깨달음을 얻어야 할까? 이 사건에 대한 가장 큰 초점이나 관심사는 흥미꺼리 또는 선정적이며 폭로하는 보도, 젊고 유능한 연예인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나 슬픔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는 이 시대에 가득하게 차있고 널리 퍼진 허무와 죽음의 문화, 사단의 문화에 대한 하나의 현상이며 증상이다. 복음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다. 그 복음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서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한 국가와 민족 또 온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기독교 문화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확장된다.

  이것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가 도전하며 변화시켜야 될 중요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세상을 조정하며 사단이 그렇게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이 시대에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사상, 문화, 생활에 침투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문화와 현상은 더 심각해지며 사단은 발악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나 자녀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구원만으로 결코 안 된다. 생명의 문화를 세우며,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생명 받아 생명의 법칙대로 서로 살아가자

  구원이 무엇인가?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살아 난 사람들이 그 생명을 누리며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천국 공동체이다. 따라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도 교회에서 계속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신분은 거듭난 구원의 백성인데 실제 살고 체험하는 것은 죽음의 법칙과 불신자의 삶을 따라 산다는 것이다(롬 8:12~13).

  최고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주는 교회이다. 생명의 법칙대로 움직이는 교회이다. 누구든지 들어와서 생명을 얻으며,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교회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생명의 역사이다. 구원 얻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은혜이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교회는 바로 이런 생명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생명을 확인하고 또 다른 죽음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살려주는 공동체이다. 물론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더라도 우리는 종종 시험과 유혹에 빠진다. 혼자서는 설 수 없다. 나 홀로 걸어야 할 신앙의 길도 있지만 함께 걸어야 할 길도 있다. 힘들면 나눠지고 눈물도 닦아주며 기쁨도 나누면서 말이다.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약하면 붙들어주는 것이 생명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교회 모습이다.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단의 역사이다. 정죄와 판단, 분열로 나타나는 죽음의 법칙은 분명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혹시 그 동안 우리는 생명의 법칙보다 죽음의 법칙을 따라 살지 않았는가? 교회가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아갈 때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 수 있다. 아무리 마음 상하고 상처입고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이어도, 그 사람의 과거에 불행하고 흉악한 일이 있었어도, 세상 사람 전부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이 들 때에도 생명의 법칙이 있는 교회는 그 모든 영혼들을 껴안으며 치유하며 세워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과 생명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흐르게 하자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핵심은 왕 같은 제사장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복 주시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복 주실 때 자기 백성을 통해서 복 주신다. 나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복의 통로인 그리스도인이 이 땅 어떤 곳에서 중보 사역을 해야 할까?

  중보자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누구신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 땅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이 땅에 임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이다.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정죄와 저주를 자기 몸으로 받으셨다. 중보자로서 모든 것을 품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서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도 그러한 주님의 뒤를 따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자리에 세우셨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죄를 보고서 비방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비난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시각과 심정으로 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서서 대신 기도하며 그 아픔과 그들의 죄악과 절망을 품는 사람이다.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강렬하게 외치는 사람들이나 단체 중에서 오히려 교회의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난과 폭로, 공격에 집착하는 부정적인 체질이 상습화된 모습을 본다. 그들은 하나님이 소망을 갖고 계시며 아직 역사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고 비난과 정죄의 영에 붙들려 나쁜 열매만 가득 맺는다.

  그러나 제사장의 자리에 서서 기도로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교회의 불의가 들려오면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서서 그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탄원하며 눈물로 간구한다. 왕 같은 제사장은 남의 죄와 허물을 보면 비난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자리에 중보자가 대신 서서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거룩하지 못함, 또한 세상의 처참한 현실과 높아져가는 온갖 죄악에 대해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는 심판자로 부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또는 아버지의 아픔과 탄식과 눈물과 상처를 자기 몸에 그대로 체험하도록 부름 받았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토록 애타게 마음 아파하면서 성령님을 통하여 탄식하시는 내용이 무엇인가?

  생명을 살리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보의 사명을 받은 우리가 그 자리에 서서 세상의 죄악과 상처 입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죄악, 교회와 성도의 타락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야 생명이 흘러가서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은혜, 생명, 사랑, 평화, 하늘의 복 등 모든 것이 세상이란 황무지로 흘러가게 하는 저수지가 바로 교회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흘러가게 하기는커녕 자신의 현상유지에도 급급한 무기력하고 생명력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다. 조직과 프로그램과 건물은 있지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은 상실했다. 사람을 사랑으로 치료하지 못한다. 사람을 말씀으로 키우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로서의 본질, 세상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중보 사명의 자리에 선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독교 > 교회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예수 공동체 가족의 삶  (0) 2022.09.07
구원의 새 언약 공동체  (0) 2020.08.23
우리가 상실한 교회의 본질(1)  (0) 2020.05.26
목사와 성도의 균형, 조화  (0) 2012.06.11
성전건축(2)  (0) 2010.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