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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진정한 영성과 성숙

by Visionary 2009. 4. 27.

진정한 영성과 성숙(True Sprituality & Maturity)

1. 성숙의 뜻1.1. 성숙의 뜻
 
  우선 성장(Growth)과 성숙(Maturity)의 뜻을 정리하자. 성장이란 갓 거듭난 기독교인이 초보 단계의 진리 위에서 자라감을 말한다. 따라서 단순하고 제한된 영역의 기본적인 생활을 성장의 주된 목표로 삼는다. 이 과정의 목적은 분명한 구원의 확신과 마귀의 공격을 물리침, 몇 가지의 원리를 이해하고 확신함, 교회 공동체로의 소속감을 경험함, 주님과의 개인적인 사귐 등이다.
 
  성숙이란 성장을 넘어선 보다 포괄적이고 깊은 성장을 말한다. 단순한 성경공부, 기본적인 진리와 기초적인 생활의 확립을 지나서 신앙의 자급자족뿐 아니라, 균형 잡히고 통합된 인격의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 그 결과로 다른 사람에게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앙과 삶, 인격이 형성된다. 엡 4장의
온전한 사람’이란 낱말이 바로 성숙한 사람’이란 뜻으로 충분히 자란 또는 어떤 표준에 이른’의 뜻을 가지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신령한 영적인 사람으로서 ‘말씀의 이해와 도덕적, 영적 분별력의 충분함’을 그 기준으로 말하며, 반대는 영적 유아(젖먹이)이다.

2. 성숙의 목표
 
  성숙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코 어떤 교육 과정이나 행위의 습득
, 또는 생활 양식과 가치관의 확립 등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이 성숙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부산물 또는 특징이긴 하나 목표는 아니다. 그 목표는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우리 기독교인의 성숙을 위한 유일한 목표이시고, 최고의 스승이시다. 꼭 성숙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의 의미와 목적, 목표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성숙에 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사역 등이 잘 통합되어서 실제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온전히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목표의 상실이 우리에게서 있음을 가끔 볼 수 있다. 사역을 위한 사역, 훈련을 위한 훈련 등이 그 좋은 실례이다. 영적 지도자는 피양육자의 성숙을 돕는 과정에서 이 목표를 상실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 늘 점검해야 한다.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전능하신 구세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끊임없는 성숙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피양육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과정을 훈련받아 다 맡쳤다고 저절로 영적 성숙의 사람이 되거나, 사역의 명수(名手)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훈련 프로그램은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지 성숙한 기독교인을 만들어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성숙은 공장의 자동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획일적인 상품이 아니라, 개성을 지닌 각 사람에게서 성령님의 고유한 역사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아름다운 열매이다.

  그런 점에서 골 1장 27-29에서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비밀이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면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성숙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숙의 목표는 그 어떤 훈련 방법이나 과정 또는 교재(敎材), 사역 기술의 습득(習得)등 보다도 우선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목표만큼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최선의 경주를 다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3. 성숙의 요소
 
  성숙에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 성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더욱 끝없이 풍요해지는 것이다. 엡 1장에서 이것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영적)복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럼 성숙의 요소란 단순히 영적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몇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
진정한 영성’ 다시 말해 영적이다 또는 신령하다’등의 개념을 바르게 파악(把握)할 때만 영적 요소가 정확히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점은 한국교회의 전반적 상황중 하나인 잘못된 영성 개념의 교정 및 성경적 정립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적 영성의 의미와 특성은 그 내용이 많기 때문 여기에서 낱낱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짧게 그 주요 내용을 추려서 말하면 성경의 영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성격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영성 개념은 주로 종교적 직무나 행위 아니면 인간의 열심과 충실한 규범 준수 등이었다. 마땅히 그 영역은 종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종교적인 말 자체가 우리 한국 기독교인에겐 영적이란 뜻으로 오해되어졌다. 예를 들면 헌금, 출석, 기도, 찬송 등을 충실히 하는 것과 교회의 직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제한된 직무인 안내, 헌금당번, 식사당번, 교사, 성가대 등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이라고 말하거나 영성이라고 할 때 그렇게만 제한시키지 않는다.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가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결코 종교적(영적)이란 제한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영적이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일이다. 일상과 종교의 구분은 획일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속됨과 거룩함의 구분은 그것이 행해지는 장소나 일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내용과 주체가 되는 사람의 인격에 관계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화
(Sancification)는 부엌 씽크(Sink)대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함은 정확한 지적이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구체적으로 이뤄졌을 때 우리는 그것이 영적이며, 그 삶이 거룩하고, 그 사람이 진정한 영성을 지닌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예배당과 주일 그리고 종교적 의무나 규범의 실천만이 진정한 영성의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의 약점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영향이다. 삶과 인격, 말씀과 신앙의 분리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잘못된 영성이다. 그렇다고 지나친 반동으로 좁은 의미의 영적 생활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영성의 의미는 통합적이고 전인적이지만 그 기초는 분명 복음과 좁은 의미의 영적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의 요소는 영적, 도덕적, 사회적, 신체적, 육체적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 만일 영성의 요소가 균형을 잃는다면 당연히 성숙이나 영성도 치우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것은 일그러진 삶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영성에 대한 폭넓은 시각과 이해를 가지고 각 요소를 적절하며 균형 있게 이뤄가야 한다. 영성의 포괄성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폭 넓고 균형 있는 성숙을 뜻한다.

4. 성숙의 과정
 
   성숙에도 과정이 있는가? 물론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 있는 유기체들의 특징이다. 사실 무생물에는 생명도 성장도 없다. 생명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계속적인 성장이다. 생명의 약동이 중지됨은 죽음이나 질병 상태임을 뜻한다. 그러나 이 생명의 성장이란 기계적이지 않다. 아주 다양한 과정을 거친다. 더욱 기독교인의 생명은 생물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형상으로 만들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생명체의 그것보다도 신비한 과정을 거친다.

  성경이 말하는 대략적인 과정은 거듭남에서 시작되어서 유아 그리고 성숙한 사람으로 나중에는 성령의 충만한 지배 받음이 최종적인 모습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의 성장은 도식화하거나 공식으로 제시할 수 없다. 이 점이 성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꽃씨를 뿌리고 꽃이 피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그 식물이 수학과 생물의 법칙을 빌려 자신의 성장을 정확히 통보하거나,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 또 그렇게 된다면 결코 식물의 신비나 경이(驚異)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의 성숙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그리고 영원에 이르기까지 성숙하는데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과정이 있음은 분명하다. 단지 우리가 지닌 예수 생명의 성장이란 다른 것처럼 공식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의 사건 이후에 다양한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며 특이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성숙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기다림과 꾸준함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갖는다. 또한 성숙을 돕는 사람은 각 사람의 고유한 성숙 과정을 이해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5. 성숙의 주의점

  첫째로 성숙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 곧 성숙의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적 성숙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영적 성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히 6:3의 의역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숙에 대해 중요한 뜻을 가르쳐 준다.
 
  신앙의 성숙은 우리 자신에게 그 근거나 가능성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심령을 부흥시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다. 모든 교회사의 기억될만한 부흥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하셨음을 증거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으로 향한 길을 가르쳐 주시고 계속 인도하신다. 이것을 알고 믿으며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진정한 성숙을 맛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숙의 단계로 끌어 올리신다. 진흙 구덩이보다 더 심한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은 구원 그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주도권을 가지시며 우리의 삶을 간섭하신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성숙이나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끄시지만 우리 편에서도 반드시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특별하고 예외적 경우가 아니면 강제로 개입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한다. 하나님 없는 자신의 도전, 노력, 자기 義만으로는 영적 성숙을 소유할 수 없다. 아울러 영적 성숙을 경험했어도 교만해선 안되며 좌절 가운데도 낙심치 말아야 된다는 사실을 균형 있게 가르쳐 준다.

  둘째로 성숙의 창조성(創造性)이다.
이것은 우리의 성숙 자체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으로서 친히 하나님이 나의 나됨을 구원 사건 속에서 이뤄 가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고, 다 아는 사실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뤄 가시길 원하나 우리 쪽에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이 성숙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시나, 그것은 철저히 세상에서 그리고 사람과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나의 성숙은 내가 누구를 만나며 어떤 사람에게서 배우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이뤄진다. 인간은 매우 주관적임과 아울러 매우 의존적이다.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의도하신 다양한 사람과 환경, 사건을 거치는데 그 사람과 그런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의존하느냐에 따라 성숙의 질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주도적 위치의 영적 지도자는 은혜의 특권도 놀랍지만 심판의 책무도 무겁다.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으론 지도자가 성숙에 있어서 결정적인 책임을 진다. 따라서 지도자는 늘 자기를 하나님과 피양육자 앞에서 철저하고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지도자로서의 모든 명성과 덕망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찬란히 드러나도록 더 깊은 자아의 죽음을 겪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친다해도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홀로 성숙하도록 조용히 돕는 사람이 진짜 지도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여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좋은 도전의 말씀이다.

  다음으론 성숙을 위해 양육을 받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 물론 지도자(양육자)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책임이 있다. 성숙의 기쁨과 감격을 지닐 때, 나에게 특별히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에 의해 성숙의 내용이 대부분 이뤄진다. 이것은 정상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 성경적이며 꼭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불완전한 존재로 성숙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의 정도가 다를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양육자 또는 영적 지도자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양육을 기쁨과 순종으로 받아 드리지만, 균형 있게 그가 가진 결점이나 고쳐야 할 과제, 실패 등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아무개의 제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성숙을 창조적 성숙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의 열쇠는 개방성과 주관성의 균형을 지니며,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아울러 최고의 권위인 성경으로 양육자의 가르침과 삶과 인격의 열매를 검증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다. 또한 너무 내가 과거에 또는 지금 크게 영향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 눈이 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 다른 지도자와 비교, 판단하게 되고 폭넓은 성숙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완전한 인간 지도자는 결코 이 세상에 존재치 않는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의 양육자나 지도자 이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을 기대하고 축하할 수 있는 지도자는 정말 위대한 지도자이다.

6. 성숙의 열매

   성숙에는 마땅히 열매가 있어야 한다. 열매는 삶과 인격의 영역이다. 열매 없는 것은 가짜이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는 엄격한 심판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숙이라는 간판에 안주하지 말고 실제 열매를 주님 앞에서 늘 확인해야 한다. 유능한 사역자(?)의 초라하고 처참한 영성이란 모순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하나님께서 아시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영성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다 일치되어야 한다.

  열매는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짐이 정상이다. 지금 나의 열매는 아름답고 충실한가? 그리고 이 열매는 나를 뽐내거나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숙하면 할수록 자신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만이 찬란하게 그들의 생애에서 드러났다. 진정한 영성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 향기를 온 세상에 흩날리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이론이나 학설로 이뤄지지 않는다. 평범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데에 늘 실패해 왔다. 그러나 정말 진정한 성숙을 통해 오늘 여기에서 예수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의 기쁨이며 감격이고 능력이다. 결국 영적 성숙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요, 결과이다.

  나 자신과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는 진정한 영성을 드러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뼈 깊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열매 없는 죽은 신앙을 그냥 무작정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구원의 영광을 생각할진대 심판이 아닌 감사와 사랑의 동기에서 진정한 영적 성숙을 위해 최선, 최고의 헌신과 충성을 주님께 드려야 하지 않을까?

7. 성숙의 수준과 정도

   지금 나 자신의 성숙의 수준(水準)과 정도(程度)는 어떤 것인가?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십자가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피고 돌아보자. 개인적 생각으론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인들의 영적 성숙이 매우 유치한 영아(瓔兒)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이것은 성숙과 영성, 제자의 삶을 바르게 아는 극소수 목회자나 선교단체들에게서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이다. 개인적인 관점과 견해로도 그리고 심지어 우리교회의 오랜 관록의 교인들에게서도 이것은 대다수 확인되는 바이다.
 
  예를 들면 말씀의 이해, 개인전도, 양육, 하나님 나라, 삶과 인격, 하나님과의 교제, 제자 사역, 교회론 이해,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제 등의 수준에 있어서 그렇다.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저급함은 어떤 면에서 교회 밖에서 더욱 비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 바른 소리는 아니지만 우리를 향한 그들의 지적(指摘)은 대부분 옳고, 우리가 겸허하게 수용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과 복음의 의미를 알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신의 영적 수준과 영성에 대한 바른 성찰(省察)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성시키시고,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께서 우리의 허위의식(虛僞意識)을 깨뜨려 주셔야만 가능하다. 거꾸로 삶과 인격, 영혼이 성령님의 검인 말씀으로 온통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진정한 영성은 절대 불가능하다.

  내 실제 수준은 내가 생각하는 영적 수준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이며, 더욱 성경의 기준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그야말로 순도(純度) 미달(未達)과 함량(含量) 부족, 기준치(基準値) 미달임을 알아야 한다. 오랜 착각과 자만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말씀 앞에서 다시 새롭게 성경적 기독교인의 성숙을 향한 여정을 향해 떠나자. 스스로가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과 삶을 근거로 죽은 영성에 계속 안주하면, 사울처럼 될까 두렵다. 영성의 성숙은 날마다 피 흘리는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엄격한 훈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어떤 것이든 성숙을 위한 영광의 고난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진정한 성경의 영성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땜질했던 대체품과 모조품을 철저히 부숴버려야 한다. 행위 치중, 공로(功勞)의식, 행사와 사역 지향성(指向性), 감투 의식, 분위기 신앙, 간증과 기적 편집증(偏執症), 율법적 규범 준수, 현세적 복의 욕심, 두 모습의 삶과 인격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유치함과 부끄러운 작태(作態)를 버리자.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과 인격
.사역 등을 분명히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자. 우리는 종교인이나 단순한 교인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포기하고 구원을 거절하던가 또는 쉽게 믿고 안일하게 사는 가짜 복음과 대중적인 기독교(Popular Christianity)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최후 심판도 기억해야만 한다.
  이제 당신 자신의 선택과 결단만이 남아 있다. 결코 진정한 성숙과 영성의 뜻을 외면치 말라. 베드로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께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고백하자. 우리 모두 진정한 성숙을 향해 나아가자! 미완(未完)의 존재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성령께서 일하셔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형상을 빚어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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