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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

촛불, 대한민국을 태우다(소통부재의 시대에서 촛불시위를 생각하다)

by Visionary 2008. 8. 25.

제목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촛불은 시위를 넘어 대한민국을 태웠다. 6.10 민주항쟁 이후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여 의사표현을 하는 일은 월드컵 응원을 빼놓고선 없었던 일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촛불시위가 최절정에 이르렀던 6월 10일엔 서울에서만 60만 명, 전국적으론 최대 1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했고, 7월 5일엔 최대 5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서 추산하고 있다. 이 추산은 촬영된 아래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클리앙, http://clien.career.co.kr의 곽공 촬영에 의한 과학적 계산법으로 보면 상당히 정확하고 타당성을 갖는 신뢰할만한 수치이다. 물론 경찰 측 추산은 주최 측 추산의 10분의 1로 통상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중요성은 숫자 추산과 비교할 바 없는 본질적이며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사회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니기에 촛불시위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나 정치적인 분석은 접어놓기로 한다. 다만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이런 사회 현상과 문화가 품고 있는 의미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근본에 집중하며, 아울러 복음 전파와 목회 및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이해하며 적용해야 할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임을 미리 전제한다.

1.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중요성
누군가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및 한나라당은 소통(막히지 않고서 통함,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을 먹통(‘멍청이’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 또는 그러한 특성을 가진 물건을 이르는 말)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라는 말을 본 기억이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현 대통령이나 정부, 정당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및 선택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말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현 촛불시위 사태에 대해 모든 전문가 및 사회학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가장 중대한 원인 또는 문제가 바로 소통의 부재이다. 크게는 정책의 시행이나 국가의 중대 사안, 작게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만이 인격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피조물로 지어졌음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의사소통은 결국 인격적인 존재 사이에서 상호 인격의 존중과 교류를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하나님이 주신 선물(카리스마)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카리스마는 본래 성경의 용어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선물)를 뜻했는데 M.베버는 이 말의 원뜻을 확대하여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켰다. 즉,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초자연적․초인간적 재능이나 힘을 이렇게 불러 그 말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근거로 맺어지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하여 지배 형태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것은 법률에 따른 합법적 지배나 관습에 따른 전통적 지배와는 달리 카리스마의 소유자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 사회에서 종교적인 뜻을 가졌던 이 말이 오늘날에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지도자가 일반 사람들의 지지나 뒷받침을 얻는 뛰어난 능력을 말하고 있다. 초인적인 대중 호소력과 선동성을 지닌 지도자에게 주로 붙이는 용어이다. 나아가 일반사람에게도 많은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뛰어나고 남다른 능력이 있을 때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반대로 민주적 지도자는 제도나 관습을 통해 이성적 사고를 가진 대중들이 뽑은 지도자, 쉽게 말하면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따지고, 후보 공약의 실현가능성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자질을 평가하여 선출한 지도자를 일컫는다.
  왜 장황하게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민주적 지도자를 말하는가 하면 현 시국 상황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소통의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변형되지 않은 본래 의미의 카리스마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더욱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라면 최우선의 지도력이 국민과 올바르게 소통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이 대통령이 당선 이전에 숱한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적어도 절차상으론 민주 절차를 거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문화, 사상이 추구하는 지도력은 선언적, 법리적 권위 그 자체로 지도력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정이나 절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사람들과의 민주적 소통과 삶의 실천을 통해 획득되고, 검증된 권위와 지도력만이 민주적 지도력과 지도자로 인정된다. 그렇다면 인수위 시절부터 발표된 영어 몰입 교육이나 대운하 프로젝트로부터 시작하여 쇠고기 수입, 의료 민영화 정책, 기간산업의 민영화(수도, 가스, 전기 등), 경쟁과 사교육 중심의 교육체계 등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먹통이 오늘 촛불시위를 일으킨 진정한 배후라고 본다. 촛불시위 배후를 빨갱이 또는 반미친북의 좌파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선동을 위한 사기라고 본다.

 <출처: 서울신문, 중고생 대상>

그렇다면 진정한 카리스마로 주어진 교회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 등의 현실은 어떠한가? 주님이 말씀하신 섬기는 자로서 낮아지고, 필요를 채워주며, 삶의 실천을 나타내고 있는가? 일반성도들과 인격적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가? 피상적인 대화, 일방적인 의사 결정, 독선적이고 오만한 사역으로 소통보다 먹통의 목회를 하고 있지 않은지 타산지석의 지혜로 정직하고 냉정하게 돌아볼 때이다. 교회는 누군가의 말대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세계관과 이념이 교회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근간이 되는 신본주의와 카리스마는 사실 민주주의보다 훨씬 탁월한 체계이며 하나님이 주신 이념과 지도력이다. 문제는 우리 현실이 통속적인 민주주의에도 훨씬 못 미친 신본주의를 빙자하고 카리스마를 오해한 독재군주의 모습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부분이 꽤 있는 점이다.
소통은 상생(相生)을 기초로 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공동체의 원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다. 교회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도 소통의 정신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주권을 가지신 주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드러난 촛불은 없지만, 속에서 타오르는 저항의 불길로 인해 교회는 분란과 대립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분열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통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것은 특히 상위 권위자와 지도자에게 만만하지 않은 과제가 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자기가 가진 권위와 지도력을 주장하지 않고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소통이 나와 너를 살리고 공동체를 탄탄하고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와 법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Web 2.0의 시대 정신과 흐름
아마 상당수 독자들은 웹web 2.0이 무슨 뜻인지 의아할 것이다. 개방형 서비스 구조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참여를 통해 핵심가치를 창출하는 인터넷 서비스로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양방향으로 정보를 주고받고 공유하며 참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한다. 이용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스스로 정보와 지식을 만들고 공유하는 열린 인터넷을 뜻한다.
인터넷 1세대는 90년대 초 인터넷상에 흩어져 있는 정보간의 링크기능을 통한 상호작용을 제공하기 위하여 HTML이라는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이용한 웹web이 인터넷 활용의 방식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으나 사용자 및 정보량 증가와 더불어 그 한계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동적 속성을 강조한 1.5세대가 등장하여 이러한 기능의 한계와 정적 문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스크립트언어나 ActiveX를 사용해 동적 문서로의 변환 및 웹상에서의 문서에 다양한 기능 추가 등 문서의 양방향성을 높이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단방향 정보 전달에 목적을 둔 정적 문서의 시대에서 벗어나 게시판을 이용하여 정보 소비자들 및 정보 생산자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인터넷 사용 환경은 더욱 향상되었으며 특히 이는 90년대 후반에 크게 확산되었다.
1.5세대를 거친 인터넷은 현재 2.0세대로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망의 광대역화와 디지털 기기의 발달에 따라 누구나 손쉽게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해 인터넷에서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환경을 가리켜 웹 2.0이라고 한다. 웹 2.0의 개념은 크게 참여, 공유, 개방으로 압축되며, 2.0의 주요 특징은 RSS를 이용한 정보 검색 방식의 진화, 열린 프로그래밍 환경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웹  2.0과 관련된 서비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UCCUser created contents를 들 수 있다.
  결국 웹 2.0이 보여주는 시대 정신은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단면으로 더 이상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일방적인 권위나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절대성과 진리의 변증에 대해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참여, 공유, 개방의 웹  2.0 시대에 있어서 예를 들면 SBS의 ‘신의 길’ 방송에 대해 항의방문이나 집단시위 또는 ‘한국 교회를 파괴하려는 마귀의 전략’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웹 1.0에도 훨씬 못 미치는 봉건 군주 시대의 방식, 더 쉽게 말하면 삼국 시대나 조선 시대의 방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얼마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 정신과 문화에 대해 무지하며 원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계속 일방적인 왕따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그렇다고 복음과 교회에 대해 일방적으로 불리하거나 곤경만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이런 상황과 문화, 시대 정신의 흐름 속에서 역설적으로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은 큰 매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창조성은 얼마든지 다양하고 창조적인 전략을 가능케 하리라고 믿는다. 다만 우리의 게으름과 편견, 선입견, 먹통 정신이 스스로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웹 2.0의 시대 정신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본질인 교회 공동체성의 근본이 되는 참여, 공유, 개방으로 나타난 코이노니아와 일치되고 있음을 알 때에 얼마든지 창조적인 수용과 적극적인 활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3. 성전이 아니라 광장
촛불시위가 시사하는 또 하나의 측면은 바로 광장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의 중심시(市)에 있는 광장으로 어원은 아고라조(모이다)로 사람들의 모임이나 모이는 장소를 의미했다. 폴리스의 시민은 집 밖의 공공 생활을 즐겼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아고라에 모여 정치와 사상 등을 토론하는 등 아고라는 일상 생활의 중심이었다. 사도 바울도 아고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변증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성전은 구약 성전 개념을 차용하여 신약의 교회당(예배당) 개념을 대체하고 있는 단어이다. 분명히 신약 시대에는 구약 성전이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구약 성전은 한시적인 기능과 장소로서 주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통한 성령의 임재와 사람 성전의 예표 역할에 불과한 곳이다. 성전은 고정적이며, 기능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사람 성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가장 본질적이며 역동적으로 나타내는 살아 있고 인격적인 현장이다. 한국 교회가 기능적이고 필요한 공간인 교회당 또는 백보 양보하여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로서 성전이라는 구약 명칭을 관습적으로 사용한다 해도 현재의 성전 개념에 고착된다면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성전 개념이 주는 폐단은 생각보다 크고 광범위하며 심각하다. 성전․성물․제사․제물 등의 용어 사용과 문제점, 즉 성전 중심 및 왜곡된 구약 신앙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하나님 계시와 구원의 역사를 무시, 부인하는 것이 됨. ②사람을 통한 교회 공동체의 성숙, 완성, 신비를 상실. ③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교회의 책임을 포기하는 이원론적인 삶. ④건물 중심의 문제 - 부동성, 융통성 결여(시설, 장소, 프로그램), 코이노니아에 부적합, 자만심 표현(크기, 시설 등), 건축에 투입된 재정, 노력 등이 주일 하루만 빼놓고 사장(死藏)됨, 소외자 외면(사람 중심이 아니므로).
유명한 신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 책에서 “밖으로 성장하는 일보다는 건물에 더 많은 돈을 소비하고, 모아진 것은 오로지 ‘교회’ 안에만 있도록 붙잡고 있으며, 선교와 전도를 하기에 앞서 건축에 열을 올리며, 그 건물을 교회 공동체의 필요를 위한 기능적 공간으로 여기지 않고, 벽에 갇혀 있는 사람의 숫자로 목회 성공과 교회 성공의 영적 깊이를 잰다”라고 말한다.
촛불시위는 광장의 가장 상징적인 표출이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가 성전에 매여 있다는 것은 스스로 소외와 쇠퇴를 재촉하는 것이다. 왜곡된 구약 성전 중심의 교회에서 신약 성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인 광장에서 소금과 빛으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 성전에 투입된 경비와 노력, 열정을 기독교 문화, 사회 복지, 구제, 인재 양성, 기독교 대안학교, 기독교 매체에 투자하는 대형 교회들이 많아질 때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위상은 이렇게 처참하게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 억 또는 백 억, 몇 백 억의 재정이 투입되는 성전 건축의 패러다임이 광장을 움직이고 광장에 영향력을 끼치는 진정한 복음과 교회의 모습으로 변모되길 바란다. 변화산에서 머물러 초막을 지어 우리만의 천국을 즐기고자 하는 유혹을 버리고 산 아래의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로 내려와야 한다.
 현재 촛불시위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촛불시위 참여 또는 반대로 단순하게 결정될 것이 아니다. 아니라면 그 촛불이 교회를 태울 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정치권의 주구(走狗)나 대변인 역할로 우리의 정체성을 변질시켜서도 안 된다. 이 글의 주제가 아니며 핵심과 관계없지만, 현 촛불시위 정국이 하루 빨리 안정되고 소통이 되며, 국민을 위하는 참 정치가 회복되고, 국민들도 위정자를 신뢰하길 소박하게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