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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 일부의 공격성과 무례함, 배타성에 대해서(다원주의, 일원주의 그리고 근본주의

by Visionary 2012. 6. 11.
- 과거에도 그랬고 최근 들어 더욱 불거지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는 보수주의의 성향인 배타주의과 공격성, 무례함을 이해하기 위해 다원주의와 근본주의를 알아야 한다. 아울러 다원주의 시대에서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변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뿐아니라 진리의 근본영역이 아닌 것들에 대해 타종교와 함께 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하고 지혜롭게 취사선택하며 전략적인 동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한국 기독교는 가면 갈수록 그 이미지가 비기독교인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이며 이기적이고, 소아병적 ...집착이 심한 공격적인 종교로만 비칠 것이다.

우선 실제 사례로 노방 전도자가 승려의 머리에 안수하는 사진, 전도랍시고 사찰에 가서 비구니승에게 내게 시집와서 살라고 희롱조로 말하는 것을 거침없는 하이킥 전도로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목사, 초파일 연등을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신학 대학원생, 법당에 가서 기도하고 사찰 땅밟기로 전투와 승리감을 고취시키는 선교단체, 지하철에서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무례하고 더러운 옷차림과 불명확한 메시지를 침튀기면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 등등.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며 마음인가? 이런 것들이 영적 전투라고 멍청하게 믿고 있는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패러다임과 방식을 복음이 완성된 지금, 지역적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의 신약시대에 그대로 대입하는 그 무지의 괴물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1. 다원주의의 반대 개념은 일원주의이다. 우선 다원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네이버 사전을 빌려 적어본다. 다원주의 [多元主義 , pluralism] - 가치의 다양성이 허용되고 존중되는 사상. 가치의 다양성이 허용되고 존중되어 소수의 입장과 가치관이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사상을 말한다. 사회는 하나의 집단이 아닌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소수의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을 통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이다. 다원주의자의 주장은 각양각색이지만 국가지상주의적 전통이론인 일원주의(≠일원론)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사회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시킴으로써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시키고, 양적,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로 국수주의는 다원주의와 관계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타민족, 타국가에 대하여 배타적 ·초월적 성격을 갖는 것을 말한다.

2. 이렇게 보면 다원주의가 무척 좋은 순기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일면 그런 내용이 장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세속철학과 사상,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한 다원주의는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핵심은 진리의 절대성과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성에 기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성경의 진리를 상대화시키며, 모든 종교를 같은 차원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몰아서 취급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원주의가 종교적 영역에 들어오면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만 취급하고 기독교 진리의 초월성, 초자연성의 근간인 계시를 부인하거나 이성으로 재해석하려는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며, 타종교에 대해 다름만 인정하지 틀림은 덮어두는 종교다원주의가 출현한다.

3.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으며,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격과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가 절대성을 주장하거나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맹신에 가까운 편협함과 배타성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의 증언과 권위를 따라 진리에는 단 한 점의 타협도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 인간의 타락 이후 자기 스스로의 이성과 양심의 작용을 따라 나름대로 찾는 구원에의 길이 다양한 자연종교들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연종교나 종교대체체제는 절대 구원을 제공할 수 없으며,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4. 문제는 진리의 절대성, 복음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수호하는 성경적 신앙을 모든 종교에 대한 공격성과 배타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근본주의 성향은 사실 근본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근본주의(원리주의)가 아니라 맹목적인 폐쇄주의 또는 오만한 고립주의에 불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근본주의의 뿌리는 미국 근본주의에서 왔다. 사실 미국 근본주의의 출발과 동기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해서 성경의 근본 진리를 수호하며 변증하는 데 있었다.

5. 그러나 근본주의가 진리의 수호에 집중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방어적 성격을 띄면서 폐쇄적이 되었고 지나치게 논쟁지향적이며 반지성주의적인 경향과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극단적 세대주의,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 과격한 감정주의, 사회적 은둔주의, 열광적 찬송주의 등의 평판을 면치 못했다. 성경으로 상대의 비성경적인 주장들을 비판하는 비판습성이 체질화 되어, 정직한 자아비판이 결여된 성향도 보인다.

6. 근본주의 운동은 점차 반(反) 지식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신학 발전의 기피현상을 빚게 되었다. 그들은 자유신학 자체를 신학발전의 결과로 보고 신학연구를 멀리하거나, 신학교육을 포기한 채, 성서학교(Bible Institute)를 많이 세워 전도자 양성에만 주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의 근본주의는 5대 교리(성경무오 및 그리스도에 대한 4대 교리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재림)를 안고 성서학교 수준에서, 단순한 전도자 양성에만 힘쓰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신학을 위해 신학적 변증과 폭넓은 신학연구를 통하여 전 신학계에 공헌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신학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7. 한국 보수주의는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한국인 특유의 흑백논리, 비합리적 사고, 대화 부재, 6.25전쟁 등을 통해 강화된 반공, 지상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마치 기독교의 근본 핵심 교리로 인식됨 등을 통해 독특하게 폐쇄적이며 공격적이고 무례한 모습으로 변종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목회자들 또한 대체적으로 신구약의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지했고, 일반 성도들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 우상숭배 척결과 진리 수호를 구약 이스라엘의 패러다임에서 그대로 대입해서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타락한 인간이며 또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자연종교에 불과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들의 인격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수호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혜롭고 온유해야 하며,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도 다 실종되어 버렸다. 타락한 인간과 모든 종교는 마귀새끼의 산물이며 오로지 공격과 배타적인 태도만이 믿음의 척도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있다.

9.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내부에서 두 종류의 극단적인 반응이 있게 된다. 하나는 더욱 자신을 합리화하며 저들이 타락한 마귀의 자식이니까 그렇게 우리를 멸시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말고 오히려 주님을 위한 핍박으로 알고 더 열심을 내자는 쪽이 있다. 반대편에서는 자기 반성의 방식으로 타종교와의 대화 및 동행에 열심을 내고 심지어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회석시키거나 양보 또는 타협해서라도 양식 있고 이성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결국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사회로부터 고상하며 그래도 광신자가 아닌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10. 그럼 우리의 선택이나 반응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성경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의 절대성, 기독교의 유일성을 변증하고 증거할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할까? 어느 선까지 불신자나 타종교인과 교류하고 연합하며 때론 도덕이나 윤리 등의 공동의제에 대해 함께 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한 길과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가 좀 더 고민하고 연구할 대목이 분명 있긴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현재의 방식이나 모습으론 복음도 증거하지 못하며 기독교 진리의 변증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11. 신학교육의 강화와 성경에 기초한 합리성으로 진리를 변증하고, 삶과 인격으로 감동을 주며, 교회가 세상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섬기고 지역사회와 더불어 갈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상식을 초월하는 기독교이지만 상식에도 못 미치는 그런 작태는 멈추며, 오히려 일반적 의미에서의 교양과 이성을 존중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현재 이런 수준과 상태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차세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