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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생명의 열매 - 변화!

by Visionary 2021. 7. 26.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1-2)

당신의 진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가요? 당신은 성경대로 변화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고,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길 원하는가요? 

  기계적인 대답이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당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진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의 대답이 ‘아니오’(No)라면 이번 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생명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두 종류의 변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

  진실로 변화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변의 영적 법칙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좋은 목회자를 만났으며, 훌륭한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자신의 변화를 간절히 희망하지 않으면 결코 변화되지 않는 것도 또한 영적 법칙입니다. 물론 우리를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외의 경우 말고는 순종과 헌신을 외면하며 거부하는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의 주도권과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책임을 결코 회피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특징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특징이 있습니다. 생명은 존재만 하지 않고 기어코 성장하며, 생명은 반드시 그 역동성(力動性, Dynamics)을 어떤 형태로든 나타냅니다. 따라서 심각한 질병의 상태가 아니라면 그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생명체가 위의 특징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본디 생명이 없었거나 아니면 생명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 생명의 실체는 너무 도드라지게 나타남이 정상입니다. 감추려 해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생명의 실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재(內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생명은 내주(內住)를 넘어서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과 현실에서 변화의 열매로서 그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예수 생명을 가진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며 열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변화’(Transformation)는 성경과 기독교의 어떤 사실에 대한 ‘지식’(Knowledge)이나 ‘정보’(Information)를 습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관계와 삶의 모범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되어진 그리스도인다운 성품, 삶, 인격으로 바뀜을 뜻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변화 없음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1) 거듭나지 못함 
- 무엇보다 ‘구원 받지 못함’의 상태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너무 많은 교인지역교회에 소속되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이 그의 출석과 교회 생활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못했고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비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으로 향하는 구도자를 제외한, 다시 말해 진리와 구원을 향한 내면과 영혼의 목마름 없이 종교 또는 친교 및 기타의 목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성경대로 바른 복음을 정확하게 선포하며 가르치지 않은 결과로 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신학이 구원 이전의 영적 준비 과정 또는 영적 회임(懷妊)과정을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로 주장한 것도 그런 착각과 오류를 가져온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구원에는 일정한 논리적, 시간적 과정이 있으며 각 과정의 영적 특징은 서로 다릅니다.)

2) 값을 치르는 삶(Paying cost of Jesus’ discipleship)의 회피 
– 구원 받았다고 모든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며, 예수 제자로서의 대가를 치르는 삶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런 유형은 변화를 알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변화를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회피합니다. 쉽게 말해서 손해 보면서 예수 믿지 않겠다는 것이죠.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한 타협과 절충 또는 자기 합리화가 이들의 명분 또는 무기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렇게 엉터리로 교회를 다니거나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오히려 값을 치르는 삶의 대체물로서 자기를 포장하거나 합리화하고, 복음의 생명이나 신앙의 본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런 세월이 오랫동안 지나면 자기 스스로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며 교회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3) 바른 지식과 훈련의 부재(不在) 
-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바른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열정과 그를 위한 대가도 치르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과 변화를 제대로 가르치거나 훈련시켜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답하고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며 체념합니다. 내면에는 이런 문제로 영적 갈등과 영적 불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의 기쁨이나 감사를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나누면 위의 세 가지가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과연 문제의 해결 방법은 없을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 생명의 능력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며 복음이 약속한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며 예수 제자로 살 수 있을까요? 단순히 구원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쓰임 받으며 영광 돌리는 목적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그리스도인 변화의 근원과 원동력에 대해 성경의 진술을 살펴봐야 합니다. 

변화의 근원과 원동력

  변화의 근원과 원동력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이미 분명하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경우는 다른 문제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그리스도인 신앙과 삶의 처음이며 끝이고 전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명확한 사실은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고 이 절망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은혜가 부어집니다. 복음은 쉽게 말하면 “I can’t, but God can do.”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며, “나는 할 수 없다.”만 말하면 절망에 그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가 복음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는 복음이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박하게 구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은혜, 호의)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 8:32)

2)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양식입니다. 그 말씀은 살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지적(知的) 동의가 ‘말씀을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며, 그 말씀이 내게서 능력으로 역사해서 나를 변화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말씀 묵상을 통한 교제(경건의 시간, Quiet Time)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매일 규칙적으로 묵상하며, 말씀의 참 뜻을 잘 깨닫는 묵상의 훈련,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아멘으로 반응하며 삶에 실천하는 매일의 훈련과 영적 전투가 생활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설교만으로 말씀생활을 대체하는 것은 너무 미숙하고 어리석은 신앙생활입니다. 내 스스로 하나님을 말씀으로 만나는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경험 없이 주일 설교가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말씀으로 매일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날수록 우리의 영혼과 삶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적 생활의 성패가 여기에 완전히 달려 있습니다.

3) 성령님의 역사(役事, 일하심)
-  사실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모순이나 충돌도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이 되며, 성령님은 오직 말씀 안에서만 일하십니다. 성령을 의뢰하지 않으면 결코 말씀의 신비와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진리와 은혜의 말씀으로 인도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지성과 이성으로도 말씀과 영적 세계를 깨달을 수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나의 변화를 원하면 그 주체가 되시는 성령님께서 당신을 다스리시고 새롭게 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변화의 과정과 순서

                                                  (우리가 변화되는 영역은 다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에는 일정한 과정과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며 근본적인 변화는 내면세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나를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이미 구원 받았다면 내는 새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과 은사를 주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이 나를 새롭게 하시며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어 나를 인도하시며, 하늘의 보좌 우편에 계신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 되신 예수님도 나를 도우십니다. 

                                                    (변화는 ‘가치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선 우리의 뿌리가 되는 내면세계의 가치부터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니 가치와 세계관, 패러다임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전에는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합니다. 이 뿌리가 변화되기 전에는 성품이나 삶, 행동, 습관 등이 바뀌는 것은 완전히 그리고 절대 불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내면세계의 핵심이 되는 가치를 성경대로 바꾸지 않고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결심도 가치의 변화 없이는 무기력하며, 어떤 결단이나 행위도 가치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을 가질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가치와 세계관, 신념 등을 성경으로 점검해 보세요. 내면세계가 하나님의 통치와 말씀의 임재에 사로잡혀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우리의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뀐다. 우리가 습관을 바꾸면 성품이 바뀌며, 우리가 성품을 바꾸면 인생도 바뀐다.” 사과나무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뿌리가 열매를 결정합니다. 나무의 반은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씨앗은 건강하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에 복음이 떨어지면 하나님 나라의 제자를 세웁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은 말씀으로 가치관과 패러다임이 변화된 상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토양에 자리 잡은 깊은 뿌리가 생명력 있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습니다. “저가 내 안에, …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마지막으로 변화는 공동체 안의 다른 형제, 자매들과 주님을 한 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통해서 그 마지막 열매를 아름답게 맺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며 방식입니다. 개인이 이루는 변화는 한계가 있으며 취약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변화되는 개인적인 측면이 있지만, 또한 그것과 똑같이 중요하며 병행되어야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Relationship)와 교제(Fellowship)를 통한 변화도 반드시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에서 숱하게 사용된 ‘서로 서로’란 단어가 바로 이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지만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함께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야말로 나를 깎으시고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최적의 현장입니다. 그러니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진리를 떠난 경우가 아니라면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공동체는 결코 없으며, 다만 나처럼 부족하고 허물과 흠이 많은 사람들의 공동체이지만 신비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운데 임하심을 경시(輕視)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겠습니다. 당신도 제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입니다.)

  신해철의 노래 중에서 ‘민물장어의 꿈’을 소개합니다. 가사가 의미심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PFC_JcVBAM&feature=youtu.be&t=200
(음악대장 하현우가 부름, 7분 49초까지)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물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기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만이라도 이룰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떠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위해


  내가 변화될 수 있는 시점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고 사라졌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현재 내가 사는 바로 지금이 유일하게 변화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지금 바로 변화되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변화를 열렬히 응원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섬길 자를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여호수아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므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 속에서 더욱더 주님을 닮아갑니다.(고후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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