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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

by Visionary 2020. 5. 26.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 - 슬픈 제목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세주(Savior)와 내 인생의 주님(Lord, master)으로 인격적인 영접을 하게 되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 그속에 들어온다. 이것은 경이로운 기적이며 신비한 사건으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를 초월한 하나님의 사건이다. 다만 선물로 그것을 주시고 성령님께서 믿고 알게 하시니 체험하며 누리고 살 따름이다.

  그런데 부교역자 시절부터 시작하여 담임목사로 끝날 때까지 약 30년의 사역 경험 속에서 정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도 그 수수께끼는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림짐작할 따름이다. 그것은 첫 단락에서 말한 기적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현상인데 분명 교회당에 나오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며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졌고 심지어 교회의 직분도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지 수십년 또는 모태교인이라는 데 결코 변화되지 않는 그의 성품이나 인격, 삶이 뚜렷하게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두자. 나는 완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또는 일시 침체하는 상태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겉으론 정상이고 자기 자신 조차도 약간 부족하지만 큰 문제 없고 별탈 없는 일반적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데 정작 그의 실제 삶이나 성품, 인격을 보면 어쩜 그렇게 변화가 없는지. 전혀 없다. 그야말로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완벽하게 변화되지 않는 똑같은 상태를 그렇게 계속 반복하며 살고 있다. 왜 그럴까? 내 목회 현장에서 가졌던 최대의 고민이었고 아픔이었으며 숙제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 원인은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구원이나 교제가 없음.
- 구원은 절대 추상적이거나 애매하지 않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본인의 내면에서부터 구원은 완벽하게 믿어지며 성령께서 확증해 주신다. 아니면 아직 구원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첫 만남은 구원말고도 구원 이후에도 지속적이며 정기적인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이 필요하다. 구원만큼 중요하다. 구원을 지속시키며 자라게 하며 완전케 하는 유일한 과정이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다. 이것은 개인예배 또는 경건의 시간(Quiet Time)이라고 한다.

둘째, 하나님과의 만남뿐 아니라 그 만남을 통해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뜻과 음성에 절대 복종하지 않음.
- 물론 그 누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순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패할지라도 일단 먼저 복종해야 한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출발과 과정의 성실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명목 상의 교인(Nominal christian) 또는 종교인 (Religious christian)들을 보면 심지어 그들 가운데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바로 이 지점에서 철저히 실패한다. 예배와 개인 경건의 시간(QT)도 가지며 어떤 경우에는 진짜 은혜도 받지만 그들은 실패하며 전과 똑같다.

  왜 그럴까? 은혜가 은혜로 끝나면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은 그 은혜의 열매가 내 삶에서 맺힐 때이다. 은혜대로 일상을 살며, 불순종했던 삶의 영역과 내면세계를 은혜의 통치 아래로 가져와서 변화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변화된다. 이것은 피 흘리는 전투다. 결코 쉽지 않은 아니 내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전투다. 그래서 은혜 받고 은혜대로 살려면 또 다시 은혜가 필요하다. 손해 볼 수 있는 아니 망하거나 죽기에 이르러도 순종해 보려는 은혜, 자아를 죽일 수 있는 은혜, 불순종을 합리화하거나 핑계를 하지 않는 은혜, 삶과 신앙 또는 말씀과 인격을 분리시키며 양심과 하나님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하다.

  나는 아버님이 목사이셨던 이유로 교단의 거짓된 일부 목사들의 허위와 위선을 어렸을 때부터 봤었다. 일반 성도도 그렇지만 더욱 영적 지도자인 목사가 얼마나 자신을 위선과 허위로 포장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죄에 대해 둔감하며 악행을 스스로 꼭꼭 숨겨 누르면서도 강단에서는 가장 거룩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변화도, 생명도, 성장도, 열매도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구원일까!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다. 내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과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복종만이 살 길이다. 그래야 변화된다.

셋째, 믿고 따라갈 사표(師表)가 없음.
-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들이며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에게는 지정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관계(Relationship)와 사귐(Fellowship)으로 이뤄진다. 영적 세계에서 이것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10,000)명의 스승이 있으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전 4:15)"고 말했다.

  스승과 부모는 다르다. 산파와 엄마도 다르다. 지식의 전수로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Knowledge)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전수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변화되려면(Transformation)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 훈련 그리고 깊은 삶의 공유가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성경 지식이나 교리 공부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진짜로 변화시키는 제자훈련은 교실이나 방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참 제자 훈련은 훈련자와 양육자가 삶을 공유하며 서로 동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목사는 그 누구보다 성도들의 첫째되는 영적 부모가 되어야 마땅하며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여야 한다. 목사라고 실패가 없겠는가? 목사라고 죄를 짓지 않을까? 아니다. 다만 영적 지도자로서 막중하며 영광스런 사람 살리는 거룩하고 위대한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로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은혜가 되며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강단의 설교와 강단 밑의 말이나 행동, 삶이 서로 다르다면 그 어떤 양무리가 목자를 따르겠는가!

  우리시대의 목자들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중적이며 위장에 능숙하다. 그러니 수천년 전의 주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며 아프게 가슴을 때리고 있다. "자칭 일꾼은 많고 삯꾼 목자도 많지만, 양무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며 창자가 움직일 정도로 내면의 떨림이 있는 선한 목자는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해서 참 일꾼, 추수의 일꾼을 보내주셔서 아우성지르며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살리며, 추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라!" (마태 9:36-38)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죽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 세 가지를 생각해봤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구원 받은 자라면 그런 불가능보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 투성이 모습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다. 당신이 돌이킨다면 그리고 기꺼이 무릎을 꿇고 복종한다면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는 분이시다.

  둘 중에서 선택하라! 변화되지 않으려는 그 지긋지긋한 모조품 기적을 아니면 반드시 변화되고 변화될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당신의 선택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임지게 될 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고 살아 있을 동안 바로 이 시간에 선택하라! 어쩌면 내일은 당신의 날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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