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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회갱신

교회 갱신, 개혁과 목사 직분에 대한 이해

by Visionary 2012. 6. 11.
성경적인 교회 갱신과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교회의 비성경적인 직제와 직분에 대해 공통으로 내는 목소리가 있다. 당연히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목사직에 대한 논란이다.

- 목사제도가 성경적인가? 목사도 하나의 기능을 가진 여러 직분 중의 하나가 아닌가? 목사만 설교해야 하거나 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다시 말해 다른 지체들도 말씀을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할 수 있지 않은가?

- 항상 이런 질문과 지적 또는 외침의 소리를 들으며 안타깝고 마음 상한 점이 있다. 우선 현재 한국교회 상당수 목회자들이 자신을 구약의 제사장처럼 인식하거나 아니면 무속의 무당처럼 길흉화복을 조종하는 특별한 중보적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에...서 소위 축복권(영권, 물권, 인권)과 저주권을 들먹거리게 된다.

- 더 나아가서 목회직을 은사와 기능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비성경적인 서열이나 위계질서 또는 계급으로 인식하며 흡사 중세 로마 캐톨릭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을 특권층으로 믿는 것과 동일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실제 그런 사람들의 인격과 삶을 보면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선포한 말씀과 실제 사는 삶이 완전히 이원론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순을 위장하기 위해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거나 독재자처럼 군림하기도 한다. 아니면 자신의 어떤 사역의 업적에 매달리며 또는 외부모임에서의 정치적 위상으로 존재를 확인하기도 한다.

- 당연히 이런 작태와 오류, 착각은 비성경적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목사로 돌아가야 한다. 목사직에 대한 상세한 어원적 접근은 일단 제쳐놓자. 그러나 신약 에베소서에 교사이며 목사는 한 동일한 직분과 사람에 대한 것이며, 목사는 헬라어 그대로 번역하면 목자다. 그리고 이 목사는 그 당시 1세기 신약교회에서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서 다른 지도자들처럼 유동적이거나 옮겨 다니지 않고(전도자, 사도, 선지자 등) 지역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지도자였음도 기억해두자. 칼빈의 실수인데 오늘날 장로교회의 장로가 이 직분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신약성경의 장로, 목사(목자), 감독은 모두 동일한 직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 당시 신약교회의 지도력은 복수 지도력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르침(말씀사역)으로 섬기는 사람이 대표자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 목사는 분명 주님이 지역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세우도록 부르신 소명, 직분, 은사, 기능임에 틀림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직분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도 동일하다. 그럼 다름은 없을까? 무엇이 목사와 일반 성도들의 그 모든 것과 다른 점일까?

- 1) 권위에 있어서 다름이 있다. 물론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그렇다. 성도뿐 아니라 일반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세우고 허락하신 일반은총 영역에서의 권위가 존재한다. 권위의 뿌리는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한 선한 조화와 조화로운 공동체 삶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반영하는 데 있다.

2)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권위주의는 배격하지만 정당하고 합리적인 권위는 존중되고 인정되어야 함이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 목적이시고 피조세계에 대한 섭리의 방식이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등 모든 사회생활에서도 그렇다. 더구나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3) 권위를 쉽게 납득하지 못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단순한 이해, 이성적이며 기계적인 접근 때문이다. 평등하게 만드셨고 동등한 인격과 가치를 지녔는 데 권위의 경중과 다름이 있으면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권위는 인격적 우열이나 가치의 우열 또는 인간의 서열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평등하고 가치도 완벽하게 똑같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공동체 삶을 위해 권위의 다름과 권위자를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세우셨음을 알아야 한다.

4) 권위의 다름과 특성을 그렇다고 폭군의 보도로 쓰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섬김으로 사용하며, 사랑 안에서 행사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내 위의 권위와 권위자를 무시하거나 깔보며 속된 말로 맞먹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위자는 그에 합당한 더 무거운 삶과 인격의 권위로서 제도적 권위를 입증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또 성도들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5) 이 권위의 특성과 방향, 목적은 지도력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도력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다름이 있다. 그 성격과 정도, 범위가 다르다. 집사의 지도력과 장로의 지도력, 목사의 지도력이 다르다.

6) 따라서 목사직의 성경적 특징과 기능을 말하며 그 갱신을 논할 때 기능적인 다름으로만 말하고, 어원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관점이다. 목사직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개혁이 또 하나의 반동이 되어 목사직의 성경적이며 정당한 다름까지 일방적으로 부인하며 공격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7) 목사직에 대한 반동은 또 한 편으로 극단화된 만인 제사장주의 무차별적 적용으로도 나타난다. 위에서 말한 권위, 지도력 등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고 극단적이며 획일적이고 산술적인 동등함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평신도교회와 무교회주의가 출몰했다. 이런 경향은 더욱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기능주의와 맞물리며 더욱 증폭되고 강조되고 있다.

8) 그래서 목사를 기능직으로만 보고, 다른 직분과 아무 다름이 없기에 목사의 사역을 다른 모든 일반 성도(소위 평신도)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걸 역으로 적용해서 목사가 파트타임으로 목회하고 일반 성도들처럼 세상에서 자신의 생계를 위한 또 하나의 직업을 갖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대입하기도 한다. 물론 이건 자비량 목회와는 다른 관점이다. 세상에서의 일을 목회의 또 다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도 다른 관점인데 이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며 다른 복잡한 논제가 있기에 생략한다. 결국 교회에 책임지는 지도자가 없고, 목사로 부르심을 따라 오직 이 일에만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최우선적으로 사역하는 지도자가 없게 된다.

9) 개인적인 경험과 고백이지만 목사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나는 청년 시절에 열렬히 기도했으며, 목사되지 않는 게 내 인생의 사명이고 비전이었다. 그 이유는 목사의 길과 대가, 지도자로서의 고독을 너무 뚜렷하게 목도했으며, 가난하거나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특성 자체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러했다. 필자의 조부, 부친도 목회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뿐인가? 개척해서 목회하는 도중에도 하나님만 허락하시면 얼마든지 목회와 목사직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부르심이 너무 강력하고 분명해서 죽을지언정 떠날 수 없었기에 울면서 기도하면서 은혜로서 목회 여정을 마쳤다. 물론 일반 성도들도 자신들의 부르심과 은사, 직분을 따라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다만 지도자로서 가는 길은 다르다. 이것은 결코 똑같지 않다.

10) 오늘 한국교회의 목사직에 대한 실망과 환멸 또는 문제의식 때문 성경이 말하는 참 의미를 못보며, 오히려 우리의 상황에서 형성된 자신의 주관이나 세계관으로 목사직을 함부로 말하지 말자.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정직하게 살펴보자. 물론 가장 중요한것은 목사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목사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