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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회갱신

기독교, 개독교 그리고 MBC, 개비씨?

by Visionary 2008. 3. 6.
드디어 MBC에서 또 다시 종교계(정확히 개신교) 관련 보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뉴스 후' 보도 직후 시청자 의견 게시판에는 하루 동안 500여 건이 훨씬 넘는 의견이 올라왔으며, 한때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폭발적인 접속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보기'로 시청한 횟수도 무려 1만 2000건을 넘었단다. 이 프로그램의 다시 보기 평균 조회수는 통상적으로 평균 5000여 회라고 하는데 이와 비교하면 그 관심과 논란의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MBC는 유독 한국 개신교에 대한 친절한 애정과 철저한 파수꾼 역할을 누가 맡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임하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행적을 빙산의 일각이지만 대충 살펴보자. MBC는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때 위대한 대통령을 칭송하느라고 온갖 넘치는 아부를 다했는데 청와대에서 부탁도 안한 대통령 생일비디오까지 충성스럽게 만들고 난리를 떨었다. 그야말로 언론이 권력의 주구가 되어버렸다.

그뿐인가! 최근 1월 31일 밤 MBC TV '스포츠 뉴스'의 임모 아나운서는 음주 상태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특히 이번 음주 방송은 지난해부터 계속돼 온 최모, 장모, 문모 아나운서의 방송사고, 엄모 '뉴스데스크' 전 앵커가 아프가니스탄 한인 피랍 관련 소식을 전하다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공식 사과한 것 등은 MBC가 영화 '디워(D-War)' 일부 장면을 극장에서 무단으로 촬영한 화면을 방송한 것에 이어 일어난 것으로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말처럼 "너나 잘 하세요."라고 정직하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 '땡전'이라고 할 만큼 어용행각을 벌였지만, 지금보다는 덜 교활하고 악랄했다.

그럼에도 현재 MBC 방송은 적어도 개신교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교활한 방법으로 정보를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 시청률 대박의 달콤한 유혹과 추악한 과거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불의를 스스로 외면하고서 자칭 감시자 노릇을 통해 대중매체 제왕의 특권을 포기하기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MBC 100분 토론은 1월 31일 '종교인 과세 논란'이라는 주제로 교계의 전문가와 종교인, 시민단체 대표 등이 한자리에 모여, 종교인 과세논란 및 종교법인법 등 종교계 현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으며(이미 MBC 100분 토론에서는 지난 해 7월 종교인 과세논란을 다룬 바 있다), <뉴스후>는 2월 2일과 16일 2회에 걸쳐 교회와 사찰의 편법적 재정운영(사찰은 빠지고 개신교회만 등장)과 종교단체의 자정능력 문제를 집중 방송한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고의적이다. 왜냐하면 작년 3월 24일 <뉴스 후> 6월 10일 피디수첩에서 방영한 내용을 계속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집요하게 방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MBC 보도 내용의 일부는 사실이다. 또 그 보도 태도와 동기, 상당 부분의 왜곡과 편파에도 불구하고 그런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종교계의 본질과 기능으로 비춰볼 때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한국 기독교의 건강한 일부 그룹은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기 갱신을 위해 나름대로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다. 자정 능력의 상실이라는 것은 독단을 넘어서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기다려 주어야 할 때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의도가 있다. 아무리 그 일부 내용이 사실이며, 겉으로 포장된 명분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너무 심각할 정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제한된 지면이지만 말해보겠다.

1. 일반화의 오류

아니 한국 교회가 조용기, 김홍도, 곽선희 목사 세 사람의 전유물인가? 또 몇 개 안되는 초대형 교회와 타락한 극소수 목회자의 경우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친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일반화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인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개념과 법칙 등을 만듦"이라는 것을 너무 잘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반화에도 법칙이 있고, 범주가 있다. 왜 일반화의 극단적인 오류인지 말해 보자.

한국 교회의 70%가 100명 미만이며, 재정적인 미자립 상태이고, 한국 전체 교회의 80%는 성인출석 200명 미만, 90%는 성인출석 300명 이하의 교회이다. 6만여 교회 중 5만여 교회의 목회자는 월 100만원 이하 사례비로 생활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한 통계 자료를 인용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이 농어촌 교회 정책과 대안을 마련하고, 총회 차원의 대책수립을 위하여 2001년 8월부터 12월까지 농어촌 1천 교회를 무작위로 추출하여 무기명 응답방식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2백78명의 응답자 중 교회에서 받는 월 사례비 본봉은 30만원 미만이 40.7%, 30만원에서 49만원이 18.7%, 50만원에서 70만원은 18.7%, 80만원에서 119만원은 15.8%, 120만원에서 159만원은 5%, 160만원 이상은 1.1%였다. 즉 목회자 월 사례비 본봉 80만원 미만이 78.1%로 이들 중 대부분이 미자립교회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김동렬은 그의 칼럼 '이명박, 숭례문을 태워먹다'에서 상당 부분을 자신의 주제와 관계가 없는 개신교 사례에 할애하며, 이런 것은 결코 일반화의 오류가 아니라고 궤변에 가까운 강변을 뱉어내고 있다. 그 근거로 목사 한 사람이 잘못했으면 대다수 목사뿐 아니라 기독교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해야 기독교 공동체가 책임을 느끼고 자정 노력을 하며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판갈이가 필요하고 그 판갈이는 공동체 내부의 자정장치를 작동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화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침소봉대(針小棒大)가 어찌 사실이며 진실이 될 수 있겠는가? 일반화의 오류에는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모순이 있는데 완전주의의 오류이다. 모든 공동체에 내부 감시, 견제 장치가 필요하지만 어느 공동체와 집단인들 인류역사에서 완전한 적이 있었는가? 그게 가능한가? 완전한 폐쇄 구조에서 외부와 단절하는 수도원이나 산사에서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치열한 자기 싸움과 각고의 수도에 정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자체가 그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즉 완전함이 아닌 최선을 향한 노력만으로도 그 공동체는 존재 의의를 충분히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미꾸라지가 아니라 물 전체를 가는 판갈이 방식 후에는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지 않나? 그럼 미꾸라지를 다 없애야 할까? 또 판갈이나 자정장치가 필요해도 외부에서 싸잡아 비난하고 매도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사이비 집단이나 정신병자들의 집단이 아닌 이상 더욱 종교 집단에서 일부 소수 계층의 타락에 대해 눈감거나 비호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일반화 논리로써 특정 공동체를 비난하고 매도하면 공동체의 자정장치와 견제가 작동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무구함을 넘어선 거의 아메바 수준의 착상이다. 오히려 그 역기능으로 대다수의 정상적인 목회자와 교회까지도 비난과 멸시를 넘어서서 무고한 피해를 당하며 공범으로 몰려 선한 의지까지 좌절시키는 결과밖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일부 소수의 타락에 대해서는 그 공동체에 맡기고 기다릴 수 없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아마 어쩌면 그 대답의 근저에는 자신들의 더 지독한 타락과 변질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 은폐하려는 철저한 위선과 오만한 재판자의 심리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겉으로 정의와 한국 개신교의 각성을 촉구하는 듯해도 그 포장 속에는 아예 괴멸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2. 특수성에 대한 무지

교회와 목사의 특수성에 대해 너무 무지하며 일반논리와 관점을 무차별 대입하는 데 따른 문제도 보통이 아니다. 예를 들면 교인이 낸 헌금은 구제, 선교, 봉사 등에 사용하며, 그 헌금은 이미 소득과세를 적용받은 돈인데도 또 다시 소득세를 과세하는 것은 2중과세에 해당된다. 아울러 헌금은 동창회비, 친목회비. 부모에게 드리는 용돈 등의 성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런 돈에 대해 한국 조세법이 과세하고 있는가?

목사의 소득세 납부의 관건은 목사가 소득세를 납부해야 할 근로자인가 하는 것이다. 근로자이고 근로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소득세를 내야 한다. 최성규 목사는 "목회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납세 의무를 갖지만, 성직에 종사하고 있는 목회자에게도 근로소득세로 명목으로 세금을 가져가려 하니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법원의 판결을 보자. 2006년 4월 그 동안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되어 온 전국기독교회노동조합(이하 기독노조)이 노조법상 노동조합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 지방법원 제25민사부는 기독노조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를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한 판결에서 이같이 밝혔다. 통합총회 헌법위원회는 2005년 4월 14일 기독노조에 가입한 통합 소속 교회 내 부교역자 및 직원들에 대해 "(교단)헌법 제2편 제1장 제4조에 위반되어 불가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에 기독노조는 "피고(통합총회) 산하 헌법위원회의 이 사건 결의로 인하여 원고(기독노조)의 헌법상 권리인 단결권 등의 근로3권이 침해되었고, 원고가 불법단체로 매도되어 그 명예가 훼손되었으므로 사건 결의는 무효다"라며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원고가 노조법상 노동조합이 아니고 소속 구성원인 교회 내 부교역자들(특히 부목사) 또는 집사가 근로자라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사건 결의가 원고의 단결권 등 근로 3권을 침해하고 원고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따라서 피고가 한 이 사건 결의는 절차에 있어서 현저히 정의에 반하거나 그 내용상 현저히 타당성을 결한 것으로 명백히 인정되어 무효라고 볼 수 없으므로 원고의 청구는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고 원고인 기독노조의 청구를 기각했다. 서울중앙지법은 기독노조 소속 부목사와 집사들이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정한 데 대해 "원고 소속 부목사들과 집사들이 교회와 사용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편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판위원회도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부목사는 근로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법원 판결에 앞서 결정을 내린바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첫째, 근로계약의 경우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지위에 있는 자로서 당회 결의와 제직회 동의를 얻어 청빙됐다"며 "사실상 통상적인 사업장의 근로자와 같은 형태로 근로계약에 기초해 채용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둘째로, 임금 성격에 대해서는 "부목사에게 지급되는 사례비는 교회 형편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으나 청빙·목회 활동과 관련된 사례 성격의 금전적 보상으로서 근로기준법상 근로 대가인 임금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셋째,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에서도 부목사를 가입 대상으로 하지 않고, 부목사가 담당교구의 성례거행, 교인축복에 참여하는 등 교회의 운영과 관련해 일정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부목사는 근로자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교회법 연구원장 김영훈 장로는 "특히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세속사회의 사업장에서 임금을 대가로 노무를 제공하는 근로자가 될 수 없다"며 "근로자를 자처하는 목회자는 삯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제14조). 그러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딤전 3:15)이고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며 "따라서 교회는 근로기준법(14조)에서 규정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며, 둘째 이유는 목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종이고, 목사가 하는 일은 말씀을 전파하고 선교를 하는 일이기에 세속적인 근로에 해당할 수 없고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로기준법에서 말하는 근로자는 근로에 대한 '자기 결정성'이 없지만 목사는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원칙과 주장이 공감을 얻으려면 목회자가 받는 사례가 월정급여가 아님을 인식하며, 사례에 관계없이 나눔의 정신을 따라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또 사례의 형태도 월정급여의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원칙이나 법 논리가 아니라 세상은 목회자의 실제 삶으로 그 판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3. 한국 개신교의 공헌과 양지

사실상 이미 대형교회의 교역자들은 세금을 내고 있다. 순복음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영락교회, 소망교회 등이 그렇다. 그뿐인가! 이들 대형교회는 사회복지를 위해 복지시설이나 장애인 학교 운영 등으로 엄청난 봉사를 하고 있다. 형식적이고 명목상의 세금 몇 푼 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봉사가 아주 뛰어난 교회들이다. 약 280억의 예산을 가진 소망교회도 예산의 2/3가 외부로, 약 500억 이상 되는 명성교회도 2/3이상 선교와 복지, 구제를 위해서 사용하며, 순복음교회도 수백억을 들여 평양에 조용기 병원을 세웠다. 명성교회는 에디오피아에 대형병원을 세워 그들을 진료하고 있다.

뜻있는 중소형교회들도 그에 못지않다. 예를 들면 상계동의 승리교회(문원순 목사)는 교인들 중 노숙자가 8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매주 이들을 위한 한 끼 식사비가 250만원이라고 한다. 열악한 시골지역의 교회인 신철원 팔호교회(이정환 목사)도 노인복지를 위해 교회가 매년 4,000여 만원씩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의도적이며 공개적인 자기 홍보를 하지 않았다고 개신교가 어느 사회단체나 복지단체, 종교보다 가장 많은 사회봉사와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무지를 넘어 개탄할 사실이다. 그뿐인가! 헌혈 참여, 민간 차원의 남북 협력과 나눔 운동, 제3세계 민간 원조 및 봉사, 장기기증에 있어서도 한국 개신교가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으며 선두주자로서 달리고 있다.

과거 한국 근대화의 주역으로서 계몽운동, 미신타파, 학교설립 및 인재 양성, 병원 설립과 의료봉사, 애국애족운동 등의 숱한 역사적 공로를 제쳐둔다 해도 지금도 여전히 한국 개신교는 그 정신과 흐름을 놓지 않았다. 물론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급작스런 팽창에 따른 부작용과 그에 타협한 변질은 결코 가볍지 않은 과오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임을 기억하며, 세상을 섬기는 본질적인 사명의 공동체라고 할 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 철저하고 근본적인 자기 갱신과 변혁이 절실히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드러난 문제로 과거와 현재의 공적과 봉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폄하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으며, 왜곡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사용해서 우리의 수치를 드러낼 때 구차한 자기변명이나 회피는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고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세상이 말하는 드러난 수치를 미화시키려는 도구로 우리의 공적과 봉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오히려 더욱 치열한 갱신과 개혁을 위해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리며, 잘못한 것에 대해 준엄한 비판과 잘한 것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이 균형 있게 이뤄져야 한다.

4. 대안 없는 선정주의와 폭로주의의 무한 재탕(再湯)

최근의 MBC를 필두로 하여 일부 사회단체 특히 기독교를 개독교로 유치찬란하고 악랄하게 비웃는 반기독교 단체들의 공통점이 있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 문제를 침소봉대의 수법을 통해 최대한 일반화하며 이슈로 삼을 뿐 아니라, 대중매체를 철저히 악용한다. 결국 그들의 실상은 대안이 전혀 없는 선정주의와 폭로주의에 기초한 무한재탕을 일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다른 단체들이야 제쳐놓는다 해도 공영방송의 성격을 지닌 그 영향력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MBC까지 그런 대열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한다는 것은 심히 불행한 일이다. MBC의 보도에 무슨 창조적인 대안이나 균형 잡힌 내용이 있었는가? 한국 개신교를 염려하고 종교의 순기능과 사회 공헌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지금까지의 방식(동기, 내용, 관점, 편향성 등)에 대해 정중한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뉴스 후'와 '피디수첩'이 지금까지 보인 작태는 그 내용의 완성도나 흐름을 볼 때에 분명 그렇다.

가장 불행하고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외부단체는 그렇다 해도 내부의 소위 기독교 개혁세력들의 행보를 보면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도대체 피아(彼我) 구분이 안 가는 현실이다. 물론 유치한 편 가르기나 내부 불의를 눈감아 달라는 얄팍한 말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내부의 깨어 있는 의로운 소수, 하나님 편에 서서 자기 개혁을 열망하는 작은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개혁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와도 꼭 일치된다. 그러나 기독교 내부의 자칭 개혁세력을 주장하며 정의의 파수꾼처럼 행세하는 단체들을 보면 이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는 죽이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설마 개혁(改革)이 개가죽(犬革)은 아닐 것이다. 개혁을 주장하려면 한 몸의 지체의식을 기초로 아픔을 공유하며, 겸손과 사랑을 품어야 한다. 겸손과 사랑을 품는다고 진리를 외면하거나 할 말을 못하겠는가? 하물며 일부 심하게 편향된 자칭 개혁 단체나 기독교 매체들은 내부를 향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회를 향해 거의 까발리기 수준의 행태로서 독선과 정죄하는 심판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나 내용이 내부 개혁이나 자정 작용을 하는 게 아니라 반기독교 세력의 도구로서 탁월하게 사용되는 현실에 대해 그래도 할 말은 해야 된다고 아집을 피운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개혁의 급진성이 개혁을 빙자한 파괴까지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는 현 사태에 대해 이런 생각으로 글을 맺고 싶다. 목사와 한국 개신교가 하나님의 사람과 공동체로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면, 그 공과(功過)나 시비(是非)를 떠나 무조건 회개를 통한 자기 갱신과 제도 및 정책변화를 통한 개혁이 동시에 요구되는 절체절명의 시점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을 볼 때에 우리의 거룩함과 나눔, 섬김, 사랑의 실천에 일대 혁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 그 무엇보다도 그 원동력이 되는 교회 본질과 정체성 회복을 위해 영적 각성과 부흥이 요청된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구조, 제도, 정책, 사역, 신학교 교육 등도 성경의 정신으로 철저히 돌이키며,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시대적 측면을 복음과 문화의 범주 안에서 적극 경청하고 수용해야 한다.

또한 비록 수치가 있고, 회개가 절실하지만 우리의 선한 행실과 봉사에 대해 더 이상 겸손한 감춤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며, 복음과 교회에도 유익하지 못하다. 나팔을 불어 의기양양하게 건방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홍보와 여론전파, 대중매체의 선용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내부 고발자들에게도 말한다. 당신이 고발자가 아니라 중보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더 준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제발 우리부터 진리와 사랑으로 균형을 견지하며, 바른 관점을 갖자. 하나님 편에 서서 뚜렷한 분별력을 갖고 하나님의 거룩한 소수가 되어 진정한 변혁의 그루터기가 되자. 그리하여 이 상황과 기회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한국 교회가 초심을 회복하고 세계 복음화와 통일한국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길 소망한다. 그 출발과 핵심은 항상 그렇지만 바로 나 자신과 우리 교회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