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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

종려주일 스케치와 말씀의 묵상

by Visionary 2020. 4. 6.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이었기에 가정예배에서 나눈 마태복음 21:1-11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이 나눔이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증표로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삶을 통해 이 한 주간 우리의 심장에 사랑과 은혜의 복음이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되길 바랍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

주님의 지상 생애의 최후 한 주간이 시작되며,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인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숙명의 예루살렘 여정이 시작되는 날의 첫 엑스트라는 나귀와 이 나귀의 새끼입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은 이미 구약성경(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에 정확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서 나귀에게 필요 이상의 초점을 두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우스꽝스런 그러나 보편적인 한국목사들의 설교처럼 “우리도 나귀처럼 주님을 섬기자!”란 제목으로 대지 1)나귀는 겸손해야 한다. 2)나귀는 복종해야 한다. 3)나귀는 주님만을 섬겨야 한다.

ㅎㅎ 이런 설교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엉터리 설교를 풍유적인(allegorical) 설교라고 합니다. 제발 속지 마세요. 엉터리 해석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오도된 개인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은혜 이전에 정확한 해석과 하나님의 계시 전달이 설교자의 최우선 책무입니다.

아무튼 나귀를 의인화시킨다면 그날 나귀는 얼마나 감격했고 감사했을까요? 나귀 못지 않게 주인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나귀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고 재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기에 나귀 주인과 주님이 이전에 교분이 있었는지 또는 사전 약속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상당 부분을 암시합니다. 3절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나귀 주인은 주님의 지나친 요구에 대해 그 주권을 인정하면서 즉시 보내는 절대복종의 결단을 내렸던 사람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 주인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간과할 수 없는 교훈과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영광스런 구속사에서 사실 나귀와 나귀 새끼 또 그 주인은 주연이나 조연이 아닌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전체 드라마에서 아무 의미가 없고 영향이 없는 그런 단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꼭 나귀를 타지 않으셔도 되고 아니면 다른 짐승이나 탈 것을 대신하실 수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런 역사를 이루는 다양한 도구, 환경과 사건, 사람들이 있는데 그 비중과 위치에 전혀 관계없이 각기 쓰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가 각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자신을 어떻게 드리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은 그 인생의 성공과 실패, 충성과 불충성을 판단하십니다. 세상이 또는 다른 사람이 내 환경과 사건, 내 외모나 학력 또는 온갖 것들에 주목하며 그것들로 나를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단 하나, 내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복종하며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위대한 주연보다 보잘 것 없는 조연이나 단역이 훨씬 중요합니다. 사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뿐 이시니까요.

결국 내 인생과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 그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해 복종하는 인생인가?"로 평가됩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 그리고 그 주인이 우리에게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역사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나귀를 타신 만왕의 왕

본문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나귀를 타신 유일한 주연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제왕으로서 화려하고 위엄 있는 대열의 호위를 받거나 병거를 타시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볼품없고 지극히 평범한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 초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거부하지 않으셨던 절대복종을 보여주셨고 그 복종으로 우리의 지독하게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 통치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며,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렇게 만만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아주 많은 고난과 아픔, 포기할 수 없는 포기를 요구합니다.

주님조차도 오직하셨으면 이 잔을 하실 수 있으면 내게서 옮겨 달라고 핏방울이 땀처럼 스물스물 피부로 나올 정도로 기도하셨을까요?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변화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우리는 마땅히 절망해야 합니다. 철저히 절망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음과 어쩔 수 없는 내 본성과 연약함 때문 울며 십자가 앞에서 엎드리어 통곡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은혜의 길이 열리고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갈등은 너무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일시적입니다.

이 시대에 만연한 신앙의 피상성은 우리 영혼을 너무 가벼운 깃털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도 그런 현대인의 요구에 쉽게 부응하여 결국 세속주의가 판치는 교회로 변질되었습니다. 싸구려 은혜와 변질된 복음의 홍수 시대에서 살아있는 진리와 생명의 교회를 찾아볼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조류에 휩쓸려 하루를 치열하게 살지 않고 떠내려가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지요?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기에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쳐야 마땅합니다. 단순히 한 선지자로만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그분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거친 군중으로 타락합니다.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던 무리는 결국 신앙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고 참 메시아(왕, 제사장,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이라’는 선동에 휩쓸린 폭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복음의 본질을 알며,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매일 걷고 있는지요? 제 자신에게 늘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걷는 삼부루의 거칠고 고달픈 길도 우리 주님의 길과 비교하면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황송하고 감사하며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한 주간 종려주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여정에 주님을 한 번 더 묵상하시고 십자가를 붙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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