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사는 게 정말 힘들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 때문에!
더군다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관계에서
가장 많은 상처와 아픔, 절망을 겪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상적이며, 추상적인 관계와 교제에서는 깊은 애정이나 신뢰도 없지만, 또한 깊은 상처나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가족이라고 가족의 모든 삶과 인생을 아는 게 아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욱 모든 인간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자신이기에
누구도 절대 똑같지 않으며,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가족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잣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용납, 이해, 사랑, 용서가 없으면 가족도 남과 다를 바 없다. 핏줄이 모든 갈등을 저절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때론 차라리 남처럼 지냈으면 하는 게 훨씬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되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가족관계의 대부분의 현실!
그렇다고 핏줄로 맺어진 천륜 다시 말해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가야하는 가족관계는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고통과 슬픔, 아픔은 더 깊이 깊이 영혼을 흔들어 놓고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살아있는 동안 가족관계의 화해와 용서, 사랑이 가장 우리 인생에게 소중한 이유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바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
(이야기 둘)
이 땅에서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 그것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수준을 넘어서는
또 다른 자기 십자가와 자기를 부인하는 길!
그런데 그것이 말보다, 생각보다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들다.
거짓된 목자로 자기 배를 불리고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목말라하면 그렇지 않겠지만
역설적으로 거룩하게 살수록, 바르게 좁은 길을 갈수록 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사방으로 에워 쌈을 본다.
이제사 조금씩 더 알아 가는 것 같다.
예수 죽인 십자가를 내 몸에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간다는 바울의 고백을 말이다!
그런데 그는 이어서 그 생명이 죽음을 통해 나타난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까지도 버겁다.
그러니 무슨 생명을 보면서 여유만만하게 갈 수 있겠는가?
부르심을 받은 1978년 9월 25일 이후 처음으로 33년만에 나는 나를 부르신 그분에게
진지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조용히 말씀드렸다.
"저 이제 이 길을 그만 두면 안될까요? 목사든, 선교사든 말이죠."
(이야기 셋)
그래서 요즘 내 자존감과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모습을 상상도 못했는데.
수치의 감정 때문 몸이 떨리고
가난과 가족의 질병에 짓눌린 내 모습이다.
참된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분처럼 하늘의 모든 영광과 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의 모양을 가지셨으며 종으로 사셨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야 높이시고 부활의 영광과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데, 나는 오늘 하루 살기가 버겁고 내일이 두렵다.
죄라면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해서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수십년 이 길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걷고 분수에 맞지 않을 정도로
순종하려는 치열한 싸움과 내려놓음, 비움의 삶을 살아온 것뿐인데
세상이 아니라 공동체와 가족들이 '바보'라고 한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어머니가 겪으셨던 그 길을 아내가 또 겪고 있으며,
내가 살았던 삶의 아픔이 자녀들에게도 또 경혐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에게 가야 할까?
아직 극복이나 승리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더 처참하게 고민하고 죽으며 산산이 찢겨진 자존감을 부둥켜 안고 울어야겠다.
하늘의 영광,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나는 오늘 한 순간을 살아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죽어야 산다는 게 뭔지 내 몸으로 체득하고 싶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눈부시다.
사는 게 정말 힘들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 때문에!
더군다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관계에서
가장 많은 상처와 아픔, 절망을 겪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상적이며, 추상적인 관계와 교제에서는 깊은 애정이나 신뢰도 없지만, 또한 깊은 상처나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가족이라고 가족의 모든 삶과 인생을 아는 게 아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욱 모든 인간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자신이기에
누구도 절대 똑같지 않으며,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가족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잣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용납, 이해, 사랑, 용서가 없으면 가족도 남과 다를 바 없다. 핏줄이 모든 갈등을 저절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때론 차라리 남처럼 지냈으면 하는 게 훨씬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되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가족관계의 대부분의 현실!
그렇다고 핏줄로 맺어진 천륜 다시 말해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가야하는 가족관계는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고통과 슬픔, 아픔은 더 깊이 깊이 영혼을 흔들어 놓고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살아있는 동안 가족관계의 화해와 용서, 사랑이 가장 우리 인생에게 소중한 이유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바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
(이야기 둘)
이 땅에서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 그것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수준을 넘어서는
또 다른 자기 십자가와 자기를 부인하는 길!
그런데 그것이 말보다, 생각보다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들다.
거짓된 목자로 자기 배를 불리고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목말라하면 그렇지 않겠지만
역설적으로 거룩하게 살수록, 바르게 좁은 길을 갈수록 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사방으로 에워 쌈을 본다.
이제사 조금씩 더 알아 가는 것 같다.
예수 죽인 십자가를 내 몸에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간다는 바울의 고백을 말이다!
그런데 그는 이어서 그 생명이 죽음을 통해 나타난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까지도 버겁다.
그러니 무슨 생명을 보면서 여유만만하게 갈 수 있겠는가?
부르심을 받은 1978년 9월 25일 이후 처음으로 33년만에 나는 나를 부르신 그분에게
진지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조용히 말씀드렸다.
"저 이제 이 길을 그만 두면 안될까요? 목사든, 선교사든 말이죠."
(이야기 셋)
그래서 요즘 내 자존감과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모습을 상상도 못했는데.
수치의 감정 때문 몸이 떨리고
가난과 가족의 질병에 짓눌린 내 모습이다.
참된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분처럼 하늘의 모든 영광과 보좌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의 모양을 가지셨으며 종으로 사셨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야 높이시고 부활의 영광과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데, 나는 오늘 하루 살기가 버겁고 내일이 두렵다.
죄라면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해서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수십년 이 길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걷고 분수에 맞지 않을 정도로
순종하려는 치열한 싸움과 내려놓음, 비움의 삶을 살아온 것뿐인데
세상이 아니라 공동체와 가족들이 '바보'라고 한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어머니가 겪으셨던 그 길을 아내가 또 겪고 있으며,
내가 살았던 삶의 아픔이 자녀들에게도 또 경혐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에게 가야 할까?
아직 극복이나 승리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더 처참하게 고민하고 죽으며 산산이 찢겨진 자존감을 부둥켜 안고 울어야겠다.
하늘의 영광,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나는 오늘 한 순간을 살아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죽어야 산다는 게 뭔지 내 몸으로 체득하고 싶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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